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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고성보다 많은 남해의 덤벙 1. 크지 않은 앵강만의 덤벙 경남에서도 내륙으로 들어가면 둠벙이라 하는데 남해에서는 고성과 마찬가지로 덤벙이라 했다. 개울이 여울지면서 파여 생긴 물웅덩이도 덤벙이지만 논 안에 적당한 장소를 골라 파서 만든 물웅덩이가 진짜 덤벙이다. 원형 또는 타원형이 대부분으로 논농사를 지을 때 물을 가두고 모으는 역할을 했다. 축대를 주변에 있는 돌을 모아 쌓아올린 것은 다른 지역 덤벙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크기는 다른 지역보다 대체로 작은 편이었다. 너비가 한 길에 미치지 못하는 정도가 많았고 더 커도 대부분 두어 길 안팎에 그쳤다. 다랭이마을은 주로 산비탈을 타고 흐르는 개울물을 논에 댔기 때문에 덤벙 덕을 크게 보지는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앞으로 더 조사해 봐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겠지만 홍현·대량·소..
8] 남해 앵강만 다랑논과 삿갓배미 1.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겸손 다랑논은 골짜기를 끼고 있는 산지에서 벼농사를 짓기 위해 산비탈을 깎고 또 돋우어 만들었다. 내륙 산간 지대에 많이 보이지만 하천이 짧고 경사가 심한 바닷가 해안 마을에서도 손쉽게 볼 수 있다. 언덕배기 비탈진 땅을 논으로 만들려면 무엇보다 먼저 수평을 맞추어야 한다. 바위와 돌로 축대를 쌓고 안쪽을 흙으로 채워야 하고 높은 데는 깎아내고 낮은 데는 채워 넣어야 한다. 달구지 같은 것은 들어가지 못하니 맨손과 지게로 나르는 수밖에 없었다. 다랑논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악조건을 극복하기 위하여 최소한으로 자연을 변형시킨 조화와 타협의 산물이다. 대규모 간척이나 개간과 달리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겸손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장소가 바로 다랑논..
문형배 이야기 ⑧부채의식 1. 엉덩이가 헤진 교복 바지 문형배가 김장하 장학생이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나까지 나서서 그것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떠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대신 2019년 4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낡은 교복과 교과서일망정 물려받을 친척이 있어서 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고”라 했던 그 ‘낡은 교복’에 대해 한번 얘기해 볼까 한다. 어느 날 저녁을 겸해 술을 한 잔 하는 자리에서 그는 그 ‘낡은 교복’의 실체를 입에 올린 적이 있다. 중고등학생 때 엉덩이가 헤진 교복 바지를 입고 다녔는데 그게 창피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격한 공감의 웃음이 떠올랐다. 그가 먼저 하지 않았으면 내가 했을 수도 있는 이야기였다. 요즘 젊은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70년대 중·후반에 중고등학교를 다..
7] 남해 홍현마을 석방렴 1. 돌발, 돌짱이라 하는 석방렴 석방렴(石防簾)은 바닷물이 들고나는 갯가에 크고 작은 바위로 돌담을 쌓아 막은 전통 어로 시설이다. 달리 석전(石箭) 또는 석제(石堤)라 하고 우리말로는 독살이라 하는데 원래 남해에서는 석방렴이라 하지 않고 돌로 만든 발(簾)이라는 뜻으로 돌발이라 하고 또 돌짱이라고도 한다. 경사가 약간 있는 곳을 골라 반원(말발굽)이나 ㄷ자 또는 一자 모양으로 만든다. 안쪽 가장 깊은 곳은 완전히 썰물이 들어도 바닷물이 남아 물웅덩이를 이루도록 했다. 조수간만의 차이를 이용하여 밀물 때 들어왔다가 썰물 때 나가지 못한 물고기를 잡는 함정 어구다. 고기를 잡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돌담 아래쪽에 구멍을 내고 그 안에 통발을 밀어 넣어두었다가 썰물 때 건져 올려 잡는 것..
문형배 이야기 ⑦진심 1. 한밤중에 걸려온 전화 기자가 취재원에게 전화하는 일은 많지만 취재원이 기자한테 전화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문형배는 내게 서너 번은 먼저 전화를 건 적이 있다. 그것도 밤 11시나 12시가 지난 한밤중이었다. “내일 재판을 하는데 이런 일이 있어요. 이 사람이 이렇게 했는데 이게 범행 의도가 있는 걸까요, 아닐까요? 형량을 매긴다면 어느 정도가 알맞을까요?”나는 법원 출입 기자가 재판에 영향을 미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순진한 생각이지만 그래서 그냥 말을 버벅거리며 맞장구치는 정도로만 대답했다. 나중에 물어보았더니 거기에는 나름 깊은 뜻이 있었다. 법관은 법률이나 사건 자체에 매몰되는 경향이 있어서 평범한 보통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고 반영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이렇게 생..
문형배와 그의 헌법재판소가 세운 믿음 위에서 문형배 헌법재판관의 퇴임에 부쳐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는 말이 있다. 공자는 정치란 식량과 군대를 충분하게 하고 백성의 믿음을 얻는 일이라 했다. 제자 자공이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이냐고 묻자 공자는 군사라 했다. 다시 둘 중 하나를 포기한다면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식량이라 답했다. 그러고 덧붙이기를 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국가는 존립할 수 없다(民無信不立)고 했다. 잘 사는 경제나 나라를 지키는 국방보다 국민의 신뢰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목지신(移木之信)도 있다. 진나라 관리 상앙은 새 법 시행에 앞서 나무를 남문에 세우고 북문으로 옮기면 10금을 주겠다고 했다. 별것도 아닌데 큰 상금이 걸려 미심쩍었는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상금을 50금으로 올렸다. 속는 셈 치고 어떤 사람이 옮기자 즉각..
김건희는 왜 아직도 ‘여사’인가 윤석열은 이미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대통령에서 파면된 인간이다. 그런데도 그 짝을 이루는 김건희에 대해 거의 모든 보도매체가 ‘여사’라 하고 있다. 심지어 한겨레>·경향신문>··조차 그렇게 쓰고 있다. 국회의원 선거방송심의위원회가 2024년 2월 김건희특검법을 다루면서 김건희에게 ‘여사’ 호칭을 붙이지 않았다고 행정지도인 ‘권고’를 결정했고 이후 모든 보도매체가 김건희 여사라고 쓰게 됐는데 그 영향이 지금껏 지속되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보도매체들은 이 결정이 맞다고 보았으니 바꾸었겠지만 그렇다 해도 ‘여사’는 윤석열이 대통령일 때만 해당된다고 보아야 맞다. 지금 윤석열이 공적으로는 아무런 지위도 없는 평범한 민간인 신분인데도 ‘여사’라니 이는 가당치 않은 호칭이다. 옛날 조선시대에는 반역을 저지른 ..
문형배 이야기 ⑥보수주의자 1. 기울어진 운동장 한때 노회찬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급진 좌파라고 오해한 적이 있다. 지금도 국민의 힘 같은 수구 극우들은 노회찬이 몸담았던 정의당을 두고 극좌라는 극언을 일삼는다. 하지만 세계 보편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가운데에서 약간 왼쪽에 있는 중도좌파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급진좌파로 간주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문형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를 두고 국민의힘 부류와 조선일보는 하나같이 좌편향이라고 하는데 이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엉터리 주장이다. 아울러 우리 사회 진보 진영에서 그를 두고 진보적이라고 보는 시각도 착시 현상일 따름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는 헌법과 법률을 지키려고 하는 보수주의자라는 규정이 더 알맞다. 이는 그가 내린 판결을 ..
문형배 이야기 ⑤지역법관 1. 가족이 모두 이사한 까닭은 1965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 문형배는 법관으로 임용된 이후 1992년부터 줄곧 부산·경남에서 판사 생활을 했다. 부산지방법원과 부산지법 동부지원, 창원지방법원과 창원지법 진주지원, 부산고등법원과 부산가정법원이 그의 근무처였다. 이른바 엘리트 법관의 출세 코스인 서울중앙지방법원~서울고등법원~법원행정처에서는 일한 적 없는 100% 지역법관이었다. 문형배는 2004년 2월 부장판사로 승진하면서 처음으로 부산을 벗어나 창원지방법원으로 옮겨왔고 그때부터 2007년 2월까지 3년 동안 합의재판부인 제2형사부와 제3형사부를 맡아 일했다. 당시 부산에 집을 마련하고 살았던 그는 창원지법 발령이 나자 아내와 아들 등 가족을 모두 데리고 창원으로 이사했다. 지금도 그때도 다른 사람들은 ..
‘윤석열 자택’이라고 하는 매체가 늘어났다 4월 7일 ‘민간인 윤석열에게 사저는 없다’는 글을 써서 올린 적이 있는데 요지는 이렇다. 보도매체들이 대부분 윤석열의 아크로비스타 아파트를 사저라 하고 있는데 맞지 않다. 왜냐하면 사저는 고관(高官=지위가 높은 관리)들이 사사로이 머무는 집을 가리키는데 윤석열은 4월 4일 대통령에서 파면되어 고관이 아닌 민간인이다. 그러므로 존대의 뜻까지 은연중에 담고 있는 사저 대신 자기 집이라는 뜻으로 널리 쓰이는 자택(自宅)이라 하면 적당하다. 그때 이렇게 적으면서 대충 살펴봤더니 한겨레>·동아일보>·더팩트> 정도만 자택이라 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그냥 생각 없이 사저라 하고 있었다. 그런데 14일 다시 살펴보니 조금 바뀌어 있었다. 한겨레>·동아일보>·더팩트> 셋에 더해 한국일보>·뉴스1>··경향신문>··노컷뉴스..
문형배 이야기 ④공엄사관(公嚴私寬) 1. 재건축조합 부패 사건, 3명에게 징역 5년 금권선거나 부패 사건에 대한 문형배의 엄정한 판결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사법부가 신뢰를 되찾으려면 그동안 온정주의 판결을 내렸던 공무원·기업가 등 사회지도층의 범죄를 엄단해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실천했다. 그의 엄정한 판결에 지역사회는 환호했으며 창원지법에 대한 기대와 신뢰는 곧바로 수직상승했다. 문형배의 이런 판단은 공무원 등 공직 사회만 대상인 것은 아니었다. 공적인 성격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의 엄단 의지는 어김없이 적용되었다. 문형배 재판부가 2006년 1월 업무상 배임·횡령으로 기소된 의령농협 미곡처리장 박모 소장에 대해 실형을 선고한 것도 그런 사례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다. 그는 “소장은 다른 공범 2명과 함께 쌀 3468t..
문형배 이야기 ③법원주의자 1. 고법에 가면 구부러지는 기준 내가 아는 문형배는 법원주의자다. 법원을 아끼고 사랑하며 나아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그는 법원이 잘 되려면 무엇보다 주권자인 국민의 믿음과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의를 수호하는 마지막 보루인 법원이 공평무사하게 판결해야 하고 여태 그렇지 못했으면 이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고 보았다. 문형배는 열성을 다해 공정한 재판을 위해 애썼고 그에 힘입어 창원지법은 좋은 반응을 얻었다. 2005년 배영우 창원시의회 의장과 김종규 창녕군수를 실형 선고와 함께 법정구속했을 때 지역사회는 온통 환영 일색이었다. 약하고 없는 이에게 가혹한 반면, 강하고 가진 이에게 관대했던 잣대가 이제야 비로소 가지런해졌다며 다들 통쾌해했다. 그러나 사건이 문형배를 떠나 고등법원 항소심으..
문형배 이야기 ②강강약약 1. 선거법은 장식이 아니다 문형배에게 선거 부정은 주권자인 국민의 의사를 왜곡하는 것이었다. 이는 주권재민을 바탕으로 하는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만드는 반민주주의 사범이기도 했다. 그는 표를 사기 위해 돈을 뿌리는 금권선거에 대해서는 더욱 엄정하게 판결했는데 앞서 얘기한 한나라당 당시 국회의원 김정부의 아내에게 내린 징역형 판결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다른 금권선거에서도 문형배의 엄정한 선고는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았다. 2006년 5월 31일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평범한 시골의 마을 주민 8명이 선거법 위반으로 무더기 기소된 적이 있었다. 이장이 한나라당 특정 후보 지지 부탁과 함께 60만~100만 원을 나머지 7명에게 건넸고 돈을 받은 이들 중 3명은 다른 주민에게 다시 나눠주었고 4명은 그냥 ..
문형배 이야기: ① 민주주의자 1.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문형배 요즘 들어 문형배가 핫하다. 헌법재판소 소장 권한대행을 맡아 대통령 윤석열의 탄핵 소추 사건 재판에서 파면 결정을 이끌면서 그렇게 되었다. 대한민국 주권자라면 누구나 듣고 싶어 했던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말이 다름 아닌 문형배의 입에서 나왔다. 그래서 지금은 문형배와 관련된다면 무엇이든 아무리 사소해도 이야기가 되고 기사가 되고 있다. 시대의 어른이면서 진주의 남극성인 김장하 선생과의 아름다운 인연이 MBC의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와 김주완의 단행본 ‘줬으면 그만이지’로 널리 알려져 있기에 그 화제성은 더욱 커졌다. 여기저기 온갖 이야기가 쏟아지는 마당에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나도 문형배에 대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지는 않지만, 문형배는 과연 이렇게 ..
버스에서 광장을 생각했다 1. 박근혜 때는 열일곱 번, 윤석열 때는 네 번 2016~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파면 때는 그래도 창원광장이든 서울 광화문이든 주말마다는 꼬박꼬박 집회에 나갔었다. 헤아려 보니 모두 열일곱 차례였다. 2024~25년 이번 윤석열 대통령 탄핵 파면 국면에서는 집회에 참여한 횟수를 꼽아보니 고작 네 차례였다. 8년 세월만큼 늙었기 때문인 것도 같고 기력이 줄어들었기 때문인 것도 같다. 2024년 12월 13일에는 창원 내서 동네 집회에 나갔고 탄핵 소추 당일인 12월 14일에는 창원광장 집회에 나갔다. 조금 뜸하다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 변론 종결 이후 선고가 하염없이 늦추어지던 3월 15일에는 창원광장 집회에 참여해 불안함과 갑갑함을 달랬다. 그래도 달라지지 않기에 광화문 집회에 머리라도 보태야겠다 싶..
세병관을 바라보며 ‘즉강끝’을 생각했다 1. 통영의 삼도수군통제영 경남 통영에 가면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다. 줄여서 통제영이라 하는 이 장소는 조선시대 경상·전라·충청 삼도의 수군을 총괄했던 으뜸 병영으로 요즘의 해군본부에 해당된다. 이순신 장군 사후인 1604년에 조영되기 시작했지만 충무공의 호국정신은 여기서도 살아 꿈틀거린다. 통제영 한가운데에는 세병관(洗兵館)이 자리 잡고 있다. 세병관은 우리나라 전통 목조건물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그에 걸맞게 세병관은 역대 통제사들이 중요한 의전과 행사를 주관하면서 삼도 수군을 호령했던 중심 건물이다. 2. 통제영에 적은 세병·괘궁·지과 세병관에서 ‘세병(洗兵)’은 병장기를 씻는다는 말이다. 전쟁이 끝난 뒤에 피로 물든 창칼을 깨끗이 닦아 넣어두고 다시 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민간인 윤석열에게 사저는 없다 1. 관저가 없어지면 사저도 사라진다 윤석열이 현직 대통령에서 전직 대통령으로 처지가 바뀌었다. 윤석열은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 머물 자격이 없어졌다. 관저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고관들이 거처하도록 정부가 마련하여 빌려주는 집’이라 되어 있다. 신분이 고관=지위가 높은 관리=대통령이라야 관저에 머물 수 있다. 윤석열은 4월 4일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어 신분이 민간인으로 바뀌었다. 그 즉시 관저를 떠나 원래 살던 데로 돌아가야 했으나 지금껏 미적거리고 있다. 그리고 윤석열이 돌아갈 서울 서초동 아크로비스타 아파트를 두고 대부분 보도매체들은 '사저(私邸)'라 하고 있다. 사저는 관저와 짝을 이루는 말이다. 당사자가 고관일 경우에만 해당된다는 것이다. 사전에서 찾아보면 ‘고관들이 사사로이 거주하는 저택’이라..
6] 마지막이 되어 버린 남해 소량마을 동제(洞祭) 1. 동제 열흘 전에 마을 청소 소량마을에서는 동제를 음력 10월 15일에 지낸다. 이장이 제주를 맡고 있으며 축문 읽는 제관은 글만 읽으면 되니까 특별히 걸리는 것이 없는 무탈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을 정한다. 옛날에는 깔끔한 사람을 골라 제주와 제관을 맡겼는데 지금은 그럴 형편이 아니다. 한복 차림은 제주만 한다. 축문 읽는 제관도 하지 않는다. 두모마을이나 홍현마을처럼 제주가 당일 동제 지내기 전에 어디 가서 목욕재계하거나 하는 일은 예전에도 없었다. 그냥 집에서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동제 지내러 가면 되었다.  동제 준비는 1주일 전~열흘 전에 시작한다. 정결하게 천지신명을 맞아들이기 위해 마을 청소를 하는 것이 색다르다. 또 제주의 집 대문에 금줄을 치지 않는 것도 다른 마을과 다른 점이다...
5] 도끼로 밥무덤 깨우는 남해 대량마을 동제(洞祭) 1. 옛날에는 서로 하려고 했던 제관 대량마을 동제는 음력 10월 보름에 치러진다. 남해군 바닷가 마을은 대개 다 그렇다. 저녁에 해가 넘어갈 즈음인 5시 정도에 시작한다. 순서는 산신제~밥무덤제~당산제~용왕제로서 모두 네 차례 제사를 지내는데 모시는 자리가 저마다 다르다. 제주(祭主)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 이장이 맡는다. 집안에 초상이 났거나 결혼이 있거나 애기를 임신했거나 집안에 우환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 대신한다. 대신할 사람은 특별한 조건이나 기준이 있는 건 아니고 집안과 일신에 무탈한 사람 가운데 동네 의논을 거쳐 결정한다. 지금은 제주를 자원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예전에는 서로 하려고 했다. 마을 바닷가에 잔뜩 밀려드는 몰(톳이나 미역 같은 해초류를 가리키는 남해말)을 남 먼저 차지할 ..
4] 다랑논으로 유명한 다랭이마을 동제(洞祭) 1. 세 개의 밥무덤 다랭이마을에서는 동제를 밥무덤제라 한다. 밥무덤은 모두 세 곳에 있다. 북쪽을 빼고 동·서·남 세 방향에 있다. 동쪽은 옛 가천초등학교 자리(남면로679번길 17-31, 지금 바리스타김) 담장 아래 축대를 파고 들어가 있다. 남쪽은 중앙인데 남면로679번길 17-20 앞(지번은 남면 홍현리 852)에 큼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서쪽은 남면로679번길 31-9 옆 길가 야트막한 돌담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밥무덤은 하나같이 동네 길가에 있다. 재해는 바다를 통해서도 들어오지만 역병이나 액운 등은 육로를 통해서도 들어온다. 마을을 지키려고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거리나 바깥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목에다 이렇게 밥무덤을 두었다. 2. 일반 가정집 제사와 비슷 10월 보름 저녁 6시..
남해 앵강만 이웃 마을 이야기 ③홍현마을 동제 1. 동제의 명맥을 잇고 있는 중땀 홍현마을에는 중땀과 아랫땀이 있다.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가로지르는 개울이 있는데 그 남쪽이 중땀이고 북쪽이 아랫땀이다. 아랫땀은 얼마 되지 않고 중땀은 사람이 많은 편이다. 위쪽에 있는 무지개마을도 1974년에 분동(分洞)이 되기 전에는 홍현마을 웃땀이었다.  동제를 땀제사라 한다. 땀제사에서 ‘땀’은 마을을 가리킨다. 지금 땀제사를 지내고 있는 데는 중땀 하나다. 아랫땀은 지낼 사람이 없어서 얼마 전에 그만두었고 웃땀(무지개마을)은 이미 오래 전에 그만두었다. 중땀도 땀제사 존속 여부를 두고 논의한 적이 있다. 2015년 발문회의에서였는데 여차저차 이야기 끝에 계속 지내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2. 나이 순으로 제관 임명 땀제사는 이레 전(음력 10월 8일)에 ..
앵강만 두 번째 이웃 마을 이야기-두모마을 동제(洞祭) 1. 시월 초하루 제주 집 대문에 금줄 육지에서는 대부분 동제를 음력 정월 대보름에 지낸다. 남해에서는 다들 10월 보름에 지낸다. 농지에서는 오곡백과가 풍성하고 바다에서도 산물이 많은 철이 이때다. 바닷가니까 바다에 관련된 일도 있지만 한 해 농사일을 다 끝내고 감사의 뜻으로 조상님에게 드리는 제사가 동제다. 두모마을도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오랜 옛날부터 모셔왔다. 예전에는 마을 전체 동회에서 제주(祭主)와 제관(祭官)을 선정했다. 동회는 한 해 전 연말에 열렸다. 제주로 선정되면 1년 동안 경조사에 가지 못했다. 지금은 그런 정도는 아니다. 지금은 옛날과 달리 이장이 제주를 맡는데 축문 읽는 제관은 별도로 정하는 절차 없이 연세가 많거나 경험이 많은 사람이 맡아 한다. 이장이 경·조사나 또 다른 이..
당항포해전 승전 자리에 웬 가을포가 며칠 전 경애하는 영주 형이 경남 고성 당항포 자리에 가을포가 표기되어 있는 이 옛지도를 보내주었다.그러면서 이게 맞다면 당항포의 다른 이름이 가을포인가 보다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한동안 물끄러미 지도를 들여다보니 답이 모습을 나타냈다. 아마 영주 형도 이미 찾아냈을 것 같다.덧붙이자면 당항만 당항포는 1592년 6월과 1594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무찔렀던 승전의 자리이다. 이를 우리는 지금 제1차 당항포해전과 제2차 당항포해전이라 일컫는다. 따져보니 이랬다 1.왼쪽 위 파란색 동그라미 부분 당항포 자리에 ‘加乙浦(가을포) 用數(용수) 百隻(백척) 風(풍) 無忌(무기) 上(상) 적진포(積珎浦) 三十里(삼십리)’라고 적혀 있다.지금 우리말로 ‘가을포 : 100척을 부릴 수..
남해 해녀 물질 1. 남해 해녀의 고향은 제주도지금 남해에 있는 해녀들은 모두 제주도 출신이다. 제주도에서 태어나 제주도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제주도에서 물질을 익힌 사람들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들이 어려서부터 물질을 할 줄 알았을 것이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 10대 후반에 배우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2~3학년이거나 졸업을 하거나 할 즈음이다. 그런 해녀들이 육지에 나오면 스무 살 스물한 살 20대 초반이었다. 아가씨들이 다들 젊어서 호기심으로 나왔지 일거리가 있어서 나온 것은 아니다. 친구들하고 어울려 나왔다가 물질을 하게 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2. 물질할 때 쓰는 도구들 물질하러 들어갈 때 갖추는 도구를 꼽아보면 이렇다. 먼저 잠수복을 챙겨 입고 수경을 쓴다. 두렁박을 가슴에 차고 비창을..
윤석열을 사형에 처해야 하는 까닭 1.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그날 밤그날 밤 누군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텔레비전을 통해 어이없는 현실을 지켜보면서 놀란 마음으로 꼬박 밤을 지새웠다. 국회에서 비상계엄 해제가 의결되고 군병력이 철수하기 시작했는데도 계엄을 즉시 해제하지 않은 윤석열 대통령 때문에 동틀 무렵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아직도 많은 국민들은 그로테스크한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디에서도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상황이 우리가 발 딛고 선 엄연한 현실 속에서 석 달 넘게 지속되고 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거리에 나선 극우들, 망상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윤석열, 자신의 알량한 이익을 위해 윤석열을 붙잡고 늘어지는 측근들의 광기는 사그라들기는커녕 점점 더 인면수..
기장 가면 이 집 들러 보시라고 1.요즘 무슨 일이 있어 매주 또는 격주에 한 번 기장에 가고 있다. 10시 즈음 도착하면 12시 정도에 마쳐진다. 대여섯 차례는 더 가야 하고 그 뒤로도 당분간 드문드문 가야 한다. 두 달 전 처음 갔을 때 정훈희 김태화의 ‘꽃밭에서’를 찾아 임랑해수욕장 근처에 갔더랬다. 가는 길에 이 식당이 왼편으로 보이기에 그럴듯한 것 같아 들어간 것이 처음이었다. 겉모습은 허름하다 싶었는데 안으로 들어가니까 뜻밖에 깔끔했다. 생선구이를 주문해놓고 식탁에 올려져 있던 주전자를 들어 둥굴레차를 마셨는데 그 독특한 맛이 괜찮았다. 2.생선구이는 푸짐하고 맛있었다. ‘꽃밭에서’에 가서 커피를 마시면서 다음에 올 일 있으면 또 가자고 할 정도는 되었다. 5월에 한 번 더 왔었는데 그날은 '월요일은 휴무' 이러며 문이 잠겨..
양산 통도사 바위와 소나무 바위가 있었네. 거기에 뿌리를 붙인 소나무를 보았네. 갈라진 틈새에 끼인 씨앗이 싹을 틔웠구나. 고꾸라질 듯하면서도 튼튼하게 자라나 푸르게 잎을 피웠다. 그러나 천만 년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생명은 없지. 언제 어떻게 죽을지는 아무도 모르지. 재수가 좋아 자연사할 수도 있고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천재지변에 비명횡사할 수도 있고.  생명의 오고 감은 이렇듯 언제나 일정하지 않겠지. 하지만 어쨌든 왔으니 원래 본성대로 오래오래 잘 자라렴. 나도 한 번씩 와서 눈길로나마 쓰다듬어 줄게.  나무야, 소나무야. 초록 이파리 내밀고 씩씩한 모습으로 와 주어서 정말 고마워. 언젠가 네가 떠나고 없더라도 나는 조금만 슬퍼할게. 나도 생물이라서 너와 크게 다르지 않은 운명이거든.
곽재우와 이순신, 공통점과 차이점 어쩌다 보니 곽재우 장군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있는 자료 없는 자료 모두 구해 읽게 되었다. 여태 곽재우 장군의 일대를 밝혀 적은 책이 없어서 옛 기록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또 5년 동안 그렇게 하다 보니 곽재우 장군의 진면목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겨레의 성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비교·대조해 볼 생각을 ‘감히’ 먹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진면목을 알아보는 것은 곽재우 장군과 달리 무척 쉬웠다. 인터넷에서 뚝딱 두드리면 모든 것이 금세 검색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예전부터 알고 있는 것도 제법 적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을 향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열광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확인되고 재확인되었다. 이렇듯 이순신 장군은 우리 역사에서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수..
100년 전에도 천공(天空)이 있었네 일제강점기 신문 자료를 뒤적이다가 우연히 눈에 띄었다. 동아일보 1924년 4월 1일 자와 5일 자에 실려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지금 천공 같은 사람이 그때도 있었다는 게 신기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아니었다. 그때도 지금도 세상에는 착한 사람도 있지만 나쁜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지금이 좀 더 한심스러운 것 같기는 하다. 100년 전에는 시정잡배 같은 인사들이 휘둘렸지만 지금은 국정을 최고 책임지는 대통령과 아내가 휘둘린다는 얘기가 파다하니까. 옛 글투를 최대한 살리면서도 요즘 사람들도 알아듣기 쉽도록 옮겨보았다. 또 원문은 그냥 마침표가 하나뿐으로 단락 구분이 없었는데 이 또한 읽기 쉽도록 조금 고쳤다.  동아일보 1924년 4월 1일자천공대사(天空大師)가 검사국(檢事局)괴상한 예언으로 금전 사취..
말이 필요 없는 풍경 밀양 운주암에서 말이 필요없는 풍경을 보았다. 풍경은 쏟아지는 햇살을 간지럽히며 흔들렸고 작아서 아름다운 전각들은 천연스럽게 암반을 타고 앉아 았었다. 불두화는 화사하면서도 소담스러운 모습이었고 절벽은 쑥스러운지 돌아앉아 신기함을 감추고 있었다. 이러다 말을 잃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슬금 들었다. 그러잖아도 혼삶에 익숙해지다 보니 말수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운주암 : 밀양시 청도면 화악산길 249-241. 높이 932m 화악산의 해발 700m 어름 비탈에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