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돌발, 돌짱이라 하는 석방렴
석방렴(石防簾)은 바닷물이 들고나는 갯가에 크고 작은 바위로 돌담을 쌓아 막은 전통 어로 시설이다. 달리 석전(石箭) 또는 석제(石堤)라 하고 우리말로는 독살이라 하는데 원래 남해에서는 석방렴이라 하지 않고 돌로 만든 발(簾)이라는 뜻으로 돌발이라 하고 또 돌짱이라고도 한다.
경사가 약간 있는 곳을 골라 반원(말발굽)이나 ㄷ자 또는 一자 모양으로 만든다. 안쪽 가장 깊은 곳은 완전히 썰물이 들어도 바닷물이 남아 물웅덩이를 이루도록 했다. 조수간만의 차이를 이용하여 밀물 때 들어왔다가 썰물 때 나가지 못한 물고기를 잡는 함정 어구다.
고기를 잡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돌담 아래쪽에 구멍을 내고 그 안에 통발을 밀어 넣어두었다가 썰물 때 건져 올려 잡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썰물 때 안쪽 물웅덩이에 들어가 뜰채나 반두 또는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는 것이다.
2. 사라호 태풍에 허물어졌다
홍현마을에는 지금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작고 하나는 크다. 2007년에 봄에 만든 작은 것은 홍현마을 아랫땀으로 들어가면서 보면 왼편 바닷가에 있고 같은 해 늦가을에 만든 큰 것은 홍현마을숲 한가운데에서 가까운 바닷가에 있다.
옛날에도 두 개가 있었다. 250년 전에 주변 산과 바다에 바위가 많은 지역 특성을 살려 앵강만에서 최초로 쌓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앵강만에는 홍현마을 말고 두곡·용소·원천마을에도 있었는데 1959년 9월 사라호 태풍 때 네 곳 모두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 뒤로 2000년대 중반까지 새로 쌓지 못한 채 그대로 왔다. 보통은 태풍이나 해일이 닥쳐도 통째로 허물어지지는 않기 때문에 무너진 부분만 고쳐 쌓으면 다시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사라호 태풍은 워낙 세어서 그렇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3. 원형(말발굽) 또는 一자 모양
당시와 지금을 비교하면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다. 첫째로 모양을 보면 지금은 둘 다 반원(말발굽) 모양인데 그때는 큰 것만 그랬고 작은 것은 一자 형이었다. 육지와 붙은 커다란 바위를 기점으로 해서 위쪽으로 비스듬하게 육지와 45도 정도 각도로 벌어져 있는 형태였다.
두 번째로는 규모를 꼽을 수 있다. 작은 것은 원래 같은 자리에 있던 석방렴과 비슷한 크기이지만 큰 것은 원래 있던 것보다 1.5배 정도로 커졌다. 작은 것은 둘레가 100m가량이고 큰 것은 둘레가 190m 정도 된다.
세 번째로 위치는 작은 것은 원래 있던 자리에 새로 만들었지만 큰 것은 원래 자리에서 남쪽으로 170m 정도 옮겨져 있다. 원래 자리는 해안선이 둥글게 굽어지면서 바다를 향해 살짝 튀어나와 있는 곳이다. 물고기들이 아래위 양쪽에서 조류와 파도를 타고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지형이라 아주 적당한 자리였다.
새로 옮긴 곳의 지형은 해안선이 직선에 가까울 정도로 곧고 오히려 안으로 살짝 들어와 있다. 홍현마을을 가로지르는 개울이 바다로 흘러들면서 큰 갯고랑이 만들어져 있는 어귀이기도 하다. 민물과 짠물이 뒤섞이는 곳이라 영양분이 풍부해 실뱀장어를 비롯한 어린 고기들이 원래 위치 못지않게 많이 모여드는 자리다.
이리로 옮긴 데는 다른 까닭도 있다. 옛날에는 석방렴이 해산물을 잡기 위해서 필요했지만 지금은 무게중심이 체험 활동 위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체험 활동을 하려면 한꺼번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옛날 석방렴 근처에는 그럴 만한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바로 옆 제방 너머에 널찍한 공간이 있는 지금 자리를 골라서 새로 만들었다. 원래 위치보다 상대적으로 태풍에 덜 노출된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원래 자리는 썰물 때 가서 보면 원래 있었던 돌발의 흔적이 조금 남아 말발굽 모양이 희미하게 보인다. 가운데 부분은 파도와 조류에 거의 모두 쓸려나가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양쪽 가장자리도 많이 유실되었지만 당시 쌓았던 돌들이 흩어지지 않고 남은 것들이 유심히 보면 확연하게 눈에 띈다.
4. 보다 크고 튼튼해진 석방렴
네 번째로 꼽을 수 있는 차이점은 돌담의 크기와 형태다. 작은 석방렴의 돌담은 사라호 태풍 이전의 석방렴과 대체로 비슷하지만 큰 석방렴의 돌담은 옛날 석방렴보다 얼핏 봐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확실히 크고 두텁다.
옛날 석방렴의 돌담은 아래위 직각으로 자른 단면도 개념으로 보면 밑변이 넓고 위쪽은 뾰족한 정삼각형에 가깝다. 아래에서부터 차곡차곡 돌을 쌓아 그렇게 만들었다. 노동력과 시간을 가장 적게 들이면서도 물고기를 비롯한 해산물을 가두기에는 모자람이 없는 형태였다.
그런데 지금 마을숲 옆에 있는 큰 석방렴은 옛날 것보다 밑변도 더 넓어졌고 위쪽도 뾰족하지 않고 편평한 사다리꼴을 하고 있다. 2007년 처음 설치할 때 윗변을 2m로 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10년 남짓한 세월 동안 파도에 쓸리는 바람에 적지 않게 달라졌다.
말하자면 상부의 폭을 최소한 두 사람이 마주 보고 걸어도 넉넉하게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확보했다. 일상에서 먹을 해산물을 얻기 위한 실용 목적에는 맞지 않지만, 관광이나 교육 등 체험 활동에는 아주 적합한 형태라 할 수 있다.
쌓아 올린 각도도 안쪽이 75도이고 바깥쪽은 45도이다. 안쪽은 지탱하는 힘을 크게 하기 위해서 정삼각형의 내각(60도)보다 높였고 바깥쪽은 밀려드는 파도의 힘이 좀더 쉽게 부서지고 흩어지도록 하려고 그보다 각도를 낮추었다.
큰 석방렴을 보면 돌담을 이루는 바위가 옛날보다 크다. 옛날에는 지금과 달리 포클레인 같은 장비나 기계 없이 맨손이나 지게로 바위를 옮겼다. 그래서 바로 옆에 있는 바위(돌)도 옮기는 데 한계가 있었다. 지금보다 작은 돌로 쌓을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맨손이나 지게 말고 목도도 있었다. 작은 바위는 두 사람씩, 더 큰 바위는 네 사람씩 짝을 맞추어 뒷덜미에 막대기를 메고 거기에 매달아 실어 날랐다. 그럴 때 사람들은 사고가 나지 않도록 발을 맞추기 위해 “어영차 어기영차” 소리를 되풀이하며 타령을 했다.
그러다 보니 지금처럼 튼튼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 필요도 없었다. 밀물 때 물고기가 들 수 있고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면 그만이었다. 더 튼튼하게 하는 것은 시간과 노동의 낭비였다. 무너지면 다시 거기 있는 바위와 돌을 활용하여 새로 쌓는 식으로 했다.
5. 옛날엔 개인 소유 지금은 공동 소유
옛날에는 석방렴이 개인 소유였다. 다른 데는 몰라도 홍현마을의 경우는 아랫땀 박씨 집안 할아버지의 것이었다. 그래서 거기서 나는 산물은 모두 그 할아버지의 몫이었고 수리나 보수할 때 인부들에게 삯을 쳐주는 것도 그 할아버지였다.
지금 석방렴은 마을에서 공동으로 관리하고 공동으로 소유한다. 그리고 사용이나 활용에 별다른 제약이 없다. 끼니때가 다가오는데 반찬거리가 없으면 해초류든 해물이든 여기 와서 장만해 가도 된다. 처음 만들었을 때는 제법 많이 잡혔지만 지금은 별로 잡히는 게 없다.
잡히는 어종은 대중이 없다. 가까운 바다에서 볼 수 있는 물고기는 모두 포함된다. 4~5월 봄철의 멸치를 비롯해 고등어·전어·농어·망상어·숭어를 자주 볼 수 있다. 문어·해삼·멍게·소라·고동·게·새우도 있고 톳이나 미역 같은 해초류는 여전히 많다.
6. 오랜 세월 쌓아온 경험과 지식의 결정체
석방렴은 기계화를 넘어 디지털화된 오늘날의 어로 기술에 견주면 참으로 보잘것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어족자원을 보호·유지하는 한편 생계에도 보탬이 되도록 하는, 선조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온 경험과 지식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현재 앵강만에는 홍현마을 말고 신전마을에 석방렴이 하나 있고 남해 전체로 넓히면 삼동면 지족마을 해안(삼동면 삼이로24번길 106 인근)과 설천면 문항마을 어촌체험장 등 모두 네 군데에 다섯 개의 석방렴이 있다. 모두 최근에 체험 활동을 위해 만든 것들이다.
홍현마을 석방렴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세 바퀴 돌면 꿈을 이루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세 바퀴 돌면 사랑을 이룬다는 얘기도 전해 온다. 오래 된 것은 아니고 2000년대 생태관광 마을로 탈바꿈하면서 마을에서 만들어낸 스토리다.
'남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9] 고성보다 많은 남해의 덤벙 (1) | 2025.04.21 |
---|---|
8] 남해 앵강만 다랑논과 삿갓배미 (0) | 2025.04.21 |
6] 마지막이 되어 버린 남해 소량마을 동제(洞祭) (0) | 2025.04.03 |
5] 도끼로 밥무덤 깨우는 남해 대량마을 동제(洞祭) (0) | 2025.03.30 |
4] 다랑논으로 유명한 다랭이마을 동제(洞祭) (1) | 2025.0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