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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지역마다 우주의 중심이 얼마나 많은가”

 

광주문화재단 대표이사 3년 임기 마치고

친정 <전라도닷컴>으로 돌아간 황풍년 씨

 

202011월 광주시의회 광주문화재단 대표이사 인사청문회장에서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보통 이런 자리에서는 날 선 비판이나 망신 주는 비아냥이 쏟아지기 마련인데 칭찬 일색의 호평이 잇따라 터져 나왔던 것이다.

 

아무런 흠집도 찾아내지 못했다”, “인생 참 잘 사셨구나 생각이 든다”, “훌륭하신 분이다”, “광주시 인사에서 역대 최고 작품이다……. 설립 10년 만에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새로운 인물이 광주문화재단의 대표이사로 선임되는 순간이었다.

 

1964년 순천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온 뒤 1991년 전남일보에 입사했으며 이후 서울에서 국회와 정당, 정부 부처를 담당하며 경험을 쌓았다. 노조 활동을 통해 공정보도와 편집권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2004년 지역밀착형 신문 <광주드림>을 창간하고 3년 동안 편집국장을 맡았다. 앞서 2000년에는 전라도 사람·자연·문화를 다루는 월간지 <전라도닷컴>을 창간하고 20년 동안 편집장 겸 발행인을 지냈다.

 

문화기획자로서 전라도 지역말을 지키기 위해 아름다운 전라도말 자랑대회를 열었으며 그림속 전라도전’, ‘촌스럽네 사진전’, ‘광주극장과 함께 영화보는 송년회등으로 지역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여주었다.

 

전주방송·광주방송 <TV에세이 고향 사람들> MC(2006), 광주MBC <신얼씨구 학당> 패널(2008), 광주MBC <테마기행 길> MC(2012), 광주KBS <열린 마당> 패널(2012), 광주·대구MBC 공동 제작 달빛소화제패널(2016) 등 방송으로도 지역의 가치를 알렸다.

 

2016년에는 한국지역출판연대를 창립하고 대표를 맡아 이듬해 한국지역도서전을 개최하는 등 지역출판운동에 초기 동력을 제공했다. 벼꽃 피는 마을은 아름답다(2010), 풍년 식탐(2013), 전라도, 촌스러움의 미학(2016) 등 지역의 가치를 담은 책을 펴낸 작가이기도 하다.

 

대표이사 취임이

엊그제인 것 같은데 세월은 빠르게 흘러 20231213일 퇴임식을 치렀다. 지난 3년 동안의 활동에 대한 지역의 평가는 어떠한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한 번 찾아봤더니 전남일보와 연합뉴스 등 여러 매체에서 이렇게 보도하고 있었다.

 

지역성에 기반한 문화정책 개발과 지역 문화자산 및 전통문화 발굴을 통한 광주문화 브랜드를 구축해 왔다. 협치를 기반으로 연대와 협력을 강화하며 지역문화기관들의 위상 강화에 힘썼고, 내부에서는 인권 친화적 조직문화 조성을 위해 노력했다.”

 

언제나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치렁치렁한 파마머리를 휘날리는 그를 만나기 위해 창원에서 광주로 향한 것은 219일이었다. 애지중지하던 <전라도닷컴>을 떠나있었던 3년 동안 그는 어떻게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

=광주문화재단을 이끌었던

3년 동안 슬로건이 예술인을 존중하고 시민과 함께하는 광주 문화의 플랫폼이었다. 여기에 담겨 있는 뜻은 무엇인지?

 

-문화재단의 목적은 지역의 문화다양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다양한 지역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을 힘껏 지원했다. 후자가 지속되어야 전자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시민들도 공연·축제·전시에 문화예술교육까지 다양하게 향유할 수 있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자산을 끊임없이 발굴해서 찾아내고 기록해서 남길 필요도 있다. 지역 서사와 지역 이야기가 남아 있어야지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장르에서 재생산이 될 수 있고 그것이 로컬리티의 바탕이 된다.

광주문화재단은 광주시민들에게 문화예술로 서비스하는 기관이다. 시민은 시민이니까 당연히 존중받아야 하고 문화예술인들은 창작의 주체로서 존중받아야 한다. 슬로건에는 양자 모두를 주인으로 대접해야 우리 지역의 문화예술이 융성해진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

 

=없던 조직을

여럿 신설하는 등 혁신 개편했다고 들었다.

 

-먼저 경영혁신본부가 있는데 흩어져 있던 조직 기능을 한데 모아 업무 효율성을 높인 정도다. 예술상상본부는 뮤지컬 <광주> 같은 지역 서사물 보급, 광주학 총서 같은 지역 콘텐츠 출판, 과거와 역사를 담아내는 구술 작업 아카이빙, 그리고 박선홍 광주학술상 관련 업무 등이 눈에 드러나는 업무다.

예술상상본부는 광주문화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도 운영한다. ‘문화예술교육은 이렇게 합시다하면서 교육기관들을 교육한다. 교육청에도 하고 각급 학교와 유치원 등 일선 교육 기관에도 한다. 문화예술을 삶 속에 두고 하려면 이런 교육이 더욱 중요하다.

선생님들 개별 연수 프로그램도 마련하고 문화예술가나 문화예술단체에게 새로운 교육방법 개발을 맡기기도 한다. 여러 층위의 기관·단체·민간과 하는 끊임없는 협업이 강조되는 까닭이 있다. 이렇게 해야 정책의 효용성을 높일 수 있고 사회적 확산도 그만큼 쉬워진다.

 

=박선홍 광주학술상은

2022년에 처음 제정했던데 동기는 무엇인지?

 

-박선홍(1926~2017) 선생은 평생을 광주의 역사와 문화, 지리 등 연구에 바치신 분이다. 대표 저서로는 광주 1001~3권과 무등산이 있는데 일본어판이 발간되는 등 꽤 큰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유족들이 내놓으신 기금 5000만 원을 바탕으로 박선홍 광주학술상을 제정했다. 2022년 김경수 향토지리연구소장과 2023년 심영의 소설가 겸 문학평론가에게 상금 500만 원과 단행본 발행 비용을 지원했다. 박선홍 광주학술상은 광주학을 끊임없이 새롭게 하는 샘물 같은 역할을 한다.

 

=청렴감사실도 있더라.

그리고 예술인보둠·소통센터는 다른 데서는 보지 못한 명칭이다.

 

-청렴감사실이 청렴에 초점을 두고 직원들 직무 감사와 계약 관련 감사를 담당하는 것은 여느 조직과 다르지 않다. 인권 감수성, 가족 친화 직장, 양성평등 실천, 직장 내 갑질 방지 등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직원들의 자아존중감을 높이는 작업이라고 보면 된다.

예술인보둠·소통센터는 예술인 존중을 실천하는 조직이다. 기본적으로 공모사업을 진행하고 창작 지원 활동을 수행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예술인 존중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지원금과 결과물을 서로 주고받는 당사자로 그치는 경우가 태반일 수 있다.

예술인들이 실제로 가렵거나 아픈 부분을 긁어주고 어루만져주는 역할까지 해야 한다. 인터넷 작업이 낯선 연세 지긋한 원로예술인들을 예술활동 증명 확인·창작지원금 지급 등의 신청을 대행해드렸다.

부당한 임대·근로 계약, 작업 현장 갑질, 성희롱·성추행 등에 대한 법률·심리 상담을 비롯해 각종 예술인 권리 침해를 근절하고 바로잡는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문화예술인들의 눈높이에 맞는 맞춤 서비스를 새롭게 개발해서 예술인복지재단에 제공하기도 한다.

장애인들에 대한 예술 교육이나 장애인 예술가들에 대한 활동 지원도 한다. 당연히 재단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들이다. 여러 기관·단체·민간과의 협업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시민사회단체·예술단체와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긴밀히 연락했다.

 

=지역에서 문화예술인들은

기관으로부터 지원 혜택을 받는 객체로 여겨지기 일쑤인데…….

 

-여태까지는 문화예술정책이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의견과 생각대로 실행된 적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예술인보둠·소통센터는 문화예술의 현장에서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모아내는 창구 기능도 하고 있다.

2022년과 2023년 한 차례씩 백가쟁명을 개최했다. 준비하는데 대략 여섯 달이 걸렸다. 문화예술가와 시민사회단체, 지역주민, 기획자 등 여러 당사자들이 연대·협업함으로써 내용을 알차게 채울 수 있었다. 특정 분야·주제에 대해 마음껏 발표하고 토론하는 것만으로도 주인들의 축제였고 화끈한 소통이었다.

2021년 첫해에는 광주 문화예술인 전체를 대상으로 심층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실효성 있는 예술인 복지정책 수립을 위해 현장을 뛰는 그들이 실제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밀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예술인 공청회자리도 마련했다.

 

=지난 3년 동안

광주문화재단 활동을 보니까 장애인·청년에 대한 애틋함이 느껴졌다.

 

-2022~23광주형 장애인문화예술지원사업일명 예술날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장애인들이 장애·비장애 구분 없이 문화예술 현장의 구성원으로 공존하면서 예술의 날개로 함께 날아오르자는 의미를 담은 명칭이다. 음악·연극·미술·문학 등 여러 장르에 걸쳐 장애인 예술가들에게 창작 활동을 할 시간·공간과 발표 무대를 제공했다.

2023년 신년음악회는 장애·비장애예술인이 함께하는 자리로 마련했다. 한해 동안 집중 훈련을 쌓은 장애인 예술가 17명이 나의 바람을 주제로 영상과 음악을 선보였다. 8월에는 광주의 모든 장애인복지관 이용 장애인 500명을 모시고 공연을 펼쳤다.

현장에는 지역 문화판을 꿋꿋하게 지키며 예술의 길을 걷는 청년들이 있다. 어려운 여건에도 꺾이지 않는 모습을 보면 대견하고 짠하다. 이들이 가장 아쉬워하는 것이 서로 소통하면서 담론을 형성할 수 있는 공간이다.

2023년 광주문화담론지 <귄있진>을 창간하고 제2호도 냈다. 제호는 지역말 귄있다와 매거진(Magazine)을 잇대어 붙인 것이다. 꼰대들의 간섭 없이 청년들이 편집진을 구성하고 그들이 알아서 제작하고 배포하고 토론하고 평가한다.

 

=로컬리티지역성을

강화하는 부분도 돋보였다.

 

-2022년 공모사업 분야에 광주문화자산콘텐츠화제작지원을 추가 신설했다. 광주의 지역적 고유성을 담은 문화예술 창작 활동을 북돋기 위해서다. 광주의 근현대 역사·인물·예술을 소재로 해서 문화사적 고증을 거친 내용을 대상으로 했다.

뮤지컬 <광주> 출연진 일부도 지역 예술인으로 채웠다. 20232월 광주·전남권 배우를 대상으로 진행한 오디션에서 경쟁률 18:1을 기록할 정도로 호응이 뜨거웠다.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지역 특화 콘텐츠인데 글로벌로 진출하는 지금 시점까지 전부 수도권 출신 배우로 채우는 것은 맞지 않다고 보았다.

소소해 보이지만 신인풍류자랑도 있다. 2022년부터 국악 전공 초··고 예비 명인 30명을 선발해 공연 무대를 제공한다. 지역의 국악 신인을 발굴·육성하는 목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시민들에게 새로운 문화 향유 기회를 제공하는 보람도 있다.

지역에 기반한 평화·민주 등 공공의 가치를 공유하기 위한 노력도 했다. 제주 4·3과 광주 5·18 그리고 여수·순천 10·19를 기리는 특별 음악회를 공동 주관하고 광주·제주·여수·순천·광양에서 자리를 마련했다. 광주민주화운동에 뿌리를 두고 탄생한 민주주의 상징곡 님을 위한 행진곡을 재창작·재구성하고 국제화하는 노력도 아울러 펼쳤다.

 

=문화다양성의 개념을

전향적으로 파악한 프로그램은 작지만 인상 깊었다.

 

-20215월에 개최한 문화다양성의 날 행사는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이주민·다문화에 초점을 맞춘 무지개 다리 우리누리 캠프였다. 중국·필리핀·베트남·캄보디아의 다문화가족을 초청해 국가별로 놀이·의상·요리 체험을 했다.

20235월에는 문화다양성 가치 확산 캠페인을 벌여 이주민·다문화에서 청소년·노인·비건 같은 소수자문화까지 확장되고 있는 만큼 다양한 주체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공생하자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다. 문화다양성협의체 네트워크도 구성했다.

 

=지역문화예술인들의 전국 공통 민원

가운데 하나가 지원금 지급을 앞당겨 달라는 것이다.

 

-경청이 가장 중요하다. 의견을 끊임없이 듣는 과정에서 개선할 수 있었다. 현장의 요구는 정산 시기를 늦출 수 없다면 시작을 앞당겨달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3월에 공모 선정을 하고 4월에 지원금을 주고 11월까지 사업을 완료하고 정산하는 일정이었다. 이렇게 시간이 촉박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다.

지원사업 공모 시기를 앞당겼다. 1월부터면 제일 좋고 최소한 2월에는 시작하도록 한 해 전 11월에 지원사업 공모를 시작했다. 현장을 중시하고 챙기면 이처럼 사소한 것으로도 문화예술인들의 입꼬리가 올라가게 할 수 있다.

현장에서 어려워하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본인들이 공공 공연장 사용을 협약해야 지원 신청이 가능했던 것을 먼저 신청한 다음 선정되면 재단에서 매칭해주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사전 매칭 탓에 참여가 어려워지는 부조리를 바로잡았다.

 

=대표이사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재단 직원들이 주체로 나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지 싶다.

 

-직원이 계약직까지 130~140명 정도 되는데 한 명도 빼놓지 않고 11 면담을 하고 귀 기울여 들었다. 직원들의 의견은 조직 개편 등 재단의 의사 결정에 적절하게 반영했다.

직원이나 조직을 장악하지 않았다. 자율적으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조직문화를 유연하고 자유롭게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마치면서 보니까 욕먹을 정도는 아닌 것 같아 다행이다.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공모사업 규모가 24억 원 남짓에 200개를 넘을 정도로 많다. 그러다 보니 대표이사한테 이런저런 민원이 들어오기도 하는데 단 한 건도 특정 단체나 개인을 지원하라고 지시한 적이 없다. 그래서 항의를 몇 군데에서 받기도 했다.

 

=임직원 상대로 인권 관련 행사를 했던데

까닭은?

 

-20231018~20일 인권문화주간에 진행했다. 노래 가사에 담겨 있는 인권의 의미를 음미하는 인권콘서트, 예술을 통해 인권을 들여다보는 인권특강, 어둠 속 편지 쓰기와 블라인드 레스토랑 등 인권체험 등 세 가지로 구성했다.

직원들이 먼저 인권 감수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우선 자신에 대한 존중감부터 높아질 것이다. 내부적으로 다른 직원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일도 없어지고 외부적으로 문화예술인을 대하는 자세가 고급스러워지고 서비스의 질도 좋아지게 마련이라고 본다.

 

=후방지원에

그치지 않고 직접 행동한 것도 있더라.

 

-시대정신은 기후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다. 광주시민방송에서 기후위기 시대에 예술 영역의 역할은 어떠한 것인지, 실제 활동 내용은 어떠하며 향후에는 어떠해야 하는지 등을 얘기한 적이 있다. 공연·전시 등 예술 현장에도 쓰레기가 많다. 관객들 쓰레기도 있지만 예술 재료도 다 쓰레기다. 이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 이런 문제도 있다.

3년 내내 무등산 쓰담 산행을 진행했다. 집게 들고 무등산을 오르면서 쓰레기 주워 담는 쓰담도 하고 무등산 쓰다듬는 쓰담도 하는 것이다. 광주 최고의 자산인 무등산에 대한 인문·역사·지리 해설과 자연·생태 체험도 곁들였다. 덕분에 참가자들의 만족도도 제법 높은 편이었고 지역사회에 대한 파급 효과도 상당히 있었다.

 

=보기 드물게 국제 연대 활동도 있었던 것 같다.

 

-805월 광주를 겪은 당사자니까. 2021년 미얀마 현지 민주화운동 단체를 지지하고 소수민족을 후원하는 성금을 보냈고 2022년 우크라이나와-러시아 전쟁이 터지자 자선음악회를 열고 성금을 1500여만 원을 우크라이나 탈출 고려인 난민을 돕는 광주고려인마을에 전달했다. 20232월에는 지진으로 고통받는 튀르키예 난민들을 위해 방한 물품 등을 전달했다.

 

=광주는 문화와 예술이 풍성한 예향이라고 한다.

지역 문화예술인들도 풍성한지?

 

-광주시의회 행정사무감사에서 이런 소회를 밝힌 적이 있다. “광주가 문화예술의 도시라 할 수 있는 근거는 딱 하나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다양한 장르에서 많은 예술가들이 창작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모든 장르의 문화 산업 자체가 서울 수도권에 몰려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시장이 없는 상태임에도 지역에서 창작 활동을 하는 문화예술인들이 많기 때문에 광주가 예향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다.

광주도 대부분의 전업 예술가들은 엄청 가난하다. 이들로 하여금 창작활동을 계속하도록 하려면 정책적으로 시장의 기능을 대신해 주어야 한다. 문화예술 창작지원금 예산이 줄어들면 그들은 생활이 아니라 생존도 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린다.

예술가 기본 소득제가 필요하다. 한 달에 50만 원이면 그나마 급한 불은 끈다. 한국 사회에서 지역은 이게 불가피하다. 지역에는 시장이 없다. 서울에서는 너희들이 실력이 없으니까 그렇지이렇게 보지만 그것은 편향된 시각일 따름이다.

 

=아쉬움도 없지 않을 텐데.

- 아쉽고 버거운 것도 많았다. 명실상부했으면 좋겠다. 광주를 두고 민주도시 인권도시라고들 한다. 그에 부합하도록 인권과 민주주의를 문화와 예술로 승화시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데. 또 인권의 도시에 걸맞게 장애인과 노인까지 모두 장애 없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배리어 프리를 실천해야 하는데.

광주를 문화예술의 도시라고도 한다. 그러면 문화예술의 모든 현장을 중시하는 문화민주주의를 실천하고 끊임없이 모니터링해야 한다. 현장에서 나오는 그 어떤 비난이나 비판도 다 참고 달게 들어야 한다.

문화란 삶의 방식이니까 일상에 스며들어야 한다. 모든 도시의 공공기관이나 자치단체에서 운동부를 운영하듯이 11예술단체 후원, 이런 정책이 있다. 광주시가 명실상부하고 눈에 띌 만한 성과를 냈는지는 글쎄 모르겠다. 문화 다양성이 사라질 위기에 있는 장르, 시장성이 없는 장르, 시장을 다 빼앗겨 버린 장르에 대해서.

=임기를 마치고

<전라도닷컴> 복귀까지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돌아온다는 약속은 했지만 생각이 많았다. 그동안 지역을 알리는 책들을 많이는 만들어 놨던데 그게 쌓여 있더라. 돌아가면 그거 파는 일부터 해야 할 것 같다.(웃음)

<전라도닷컴>에 대해서는 언젠가는 공공의 자산으로 되도록 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아직은 <전라도닷컴>을 통해 더 많은 내용을 기록하고 남기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다. 이런 원천 자료를 바탕으로 영상 등 다양한 콘텐츠로 창출하는 원 소스 멀티 유스가 실현되면 좋겠다.

 

=지역에 대한 관심이 대단한 것 같다.

그런데 현실에서 지역은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다.

 

-자기가 사는 지역을 우주의 중심으로 삼으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뭐가 부족해서 지역이 우주의 중심이 되지 못하는가, 지금 한국에서 지역사회에 무엇이 결핍되어 있고 뭐를 보완해야 하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성공한 1%에 집중하는데 이게 굉장히 잘못된 것이다. 핵심은 이것이다. 다산이 역사상 한국 최고의 인문학자라지만 강진에 귀양 와서 춥고 배고픈 이 사람을 누가 거두어주었는가? 주막집 노파가 거두지 않았으면 그런 업적이 가능이나 했겠는가? 다산만 주인공이 아니라 그를 거두어준 노파도 주인공이다.

그런데도 일하는 사람, 피땀 흘리며 이 땅을 지켜온 사람들의 철학과 가치관에는 도통 관심을 갖지 않는다. 역사를 지탱하는 본류는 바로 이처럼 땀 흘려 일하는 보통 사람들이었다. 그분들의 희생을 우리는 생각해야 하고 우리는 대부분 그런 분들의 후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걸 알고 실천해야 제대로 갈 수 있다.

광주 투쟁도 도청을 사수했던 사람들만 주인공이 아니다. 착검한 공수부대원을 부여잡고 눈물로 호소했던 하숙집 아줌마도 주인공이다. 그날 전남대 앞에서 학생들을 향해 살기등등하게 뛰어오던 군인들의 발길을 그 아줌마가 돌려세우지 않았다면 하숙촌은 피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광주에서 탈출하는 사람들을 숨겨주고 도와줬던 버스 운전사들 같은 이들도 우리는 기억하고 지역의 주인공으로 삼아야 한다.

또 사람들은 전라도 담양 등의 누정 문화를 최고로 치면서도 양반들만 떠올릴 뿐 그걸 가능하게 만든 수많은 사람들은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 공동체를 이어온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중하게 여기고 성공한 1%만이 주인공인 여태까지의 역사에서 벗어나야 한다.

 

=모든 지역을 중심에 놓고 실천하자지역 사람이 그런 일을 하는 주인공이다,

이런 얘기로 들린다.

 

-지역 소멸을 잡을 수 있는 가장 큰 줄기는 지역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뚜렷한 인식이라고 본다.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자리가 지역이다.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자리가 우주의 중심이다. 우주의 중심이 바로 지역이다. 이런 깨달음이 필요하다.

지역은 서울이나 수도권에 맞서는 개념이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서울이 중심이라 여긴다. 여기에서 벗어나 앞에서 말한 지역이 갖는 숙명적인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런 인식 자체를 공감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이런 인식에 대한 연대가 커지면 된다. 그러면 지역을 지키는 것이 폼나고 가치있는 무엇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더 필요한 것은 그것을 지키는 것을 업으로 삼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지역의 아름다움과 가치 있음에 대한 보기를 들자면 어떤 것이 있을까?

-맹골도 미역 작업을 하는 현장에 간 적이 있다. 여름에 8월 한 달 동안 거센 파도 속에 낫질을 하고 밤낮없이 건조작업을 한다. 하는 사람은 힘들겠지만 어떤 그림이나 영상보다 아름답다. 어떤 40대 출향인 위태롭고 고된 고역을 해마다 하는 이유를 말했다. “거센 파도 속에서 낫질을 할 때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할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윗대의 윗대, 그 윗대윗대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생각합니다. 내가 낫을 놓는 순간 그 모든 이야기가 사라지고 맙니다.”

그는 자신을 40년 인생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의 존재는 수 백 년, 수 천 년, 수수 만 년 누대에 걸쳐 이어온 역사와 생명에 닿아 있었다. 자기가 발 딛고 선 지금 이 자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고 행동이었다. 지역에는 사람마다 분명한 소명이 있고 지켜야 할 압도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벼농사도 들 수 있다. 물대기와 모내기에서부터 나락을 거두고 논을 비우기까지 얼마나 아름다운 예술인가. 지게를 지고 낫이나 가래를 들고 걸어가는 것조차 예술이다. 논과 개울과 마을과 산천이 어우러지는 모습도 더할 나위 없이 멋진 경관이다.

갯벌에도 있다. 바다 저 멀리 떨어지는 해를 배경으로 갯벌에서 할머니들이 무리지어 낙지와 쏙을 캐고 있었다. 할머니들 뒤를 따라 갈매기들이 떼지어 달라든다. 붉게 물든 석양 아래 모든 사물들이 할머니들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풍경. 어떤 훌륭한 예술가도 이런 행위예술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서울 사람, 도시 사람들이 돈을 내고 보러 오지는 않는다.

-지금 전국이 출렁다리·구름다리 천지고 방방곡곡에 케이블카가 매달려 있다. 더 긴 놈 더 높은 놈 경쟁을 끝도 없이 하고 있다. 관광객의 비위를 맞추는 장치산업에 매달리면서 온 나라가 병들고 있다. 그렇지만 한 번 찾아오고 그만이지 두 번은 오지 않는다. 다음에는 더 긴 놈, 더 높은 놈이 다른 데 만들어져 있으니까.

이렇게 해서는 서울 사람들 도시 사람들로 하여금 정당한 보상을 하도록 만들 수 없다. 이제 지역들은 도시 사람들 비위 맞추는 새로운 무엇을 제공하려고 하면 안 된다. 지역이 갖는 가치가 정당한 대우와 보상을 받도록 해야 한다. 지역이 가진 자연·문화자산을 찾아내고 개발해서 유료화하여 시장을 독점한 서울에서 그 비용을 지불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문화정책과 재정 운용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트로트다 뭐다 해서 외부에서 사람들을 불러오는 데 돈을 엄청 쓰고 있다. 이렇게 할 게 아니다. 지역 사람들이 에어로빅 경연대회를 하고 지역말 잘하는 경연대회를 하는 데 돈을 써야 한다.

공동체 구성원들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기획을 해야 한다. 트로트다 뭐다 하는 건 한탕주의다. 한탕주의는 끝나고 나면 그뿐이고 쌓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월이 들어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익지 않는다. 지역의 가치를 찾아내고 남기는 데에, 문화예술로 재가공하고 재창조하는 데에 시간과 돈을 써야 한다.

지역의 자연과 생태를 서울 사람들과 도시 사람들에게 공짜로 보여줄 까닭도 없다. 그걸 가꾸고 유지·보전하는 데에도 지역 사람들의 세월과 노력이 들어가 있다. 이를테면 경남 창녕 우포늪이 있는데 무척 멋지고 그럴듯하다. 그런데 입장료를 안 받는다. 다른 복잡한 사정도 있겠지만 서울 사람 도시 사람들에게 대가를 지불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 것을 찾아내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전라도닷컴>을 통해 해왔던 일이기도 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 같기도 하다.

 

-2016년 한국지역출판연대를 창립하고 이듬해 한국 지역 도서전을 개최했다. 계기가 있었다. 일본에서 일본 지역 도서전을 본 적이 있다. 오키나와 소재 출판사가 발행한 책인데 1944~45년 태평양전쟁 막바지 오키나와 사람과 자연의 희생과 피해를 담은 기록이었다.

매우 강렬했다. 이런 책을 과연 도쿄 출판사들이 찍어낼 수 있을까. 오키나와 출판사이기에 이런 비극을 책에 담았다고 생각했다. 지역에 대해서는 지역 주체들이 취재하고 기록하고 남긴다. 지역 사람들이 지역 이야기를 책으로 대물림해야 한다. 문화의 시작과 끝은 이야기다.

모든 문화의 시작과 끝은 이야기다. 모든 지역이 책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래야 제대로 로컬 기능을 할 수 있고 대물림도 할 수 있다. 앞으로 할 일도 이런 흐름 가운데 결핍과 보완을 챙기는 쪽에서 찾고 싶다.

=지역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고 보전을 위해 활동하는 개인이나 단체는 많다.

그런데도 눈에 보이는 뚜렷한 성과가 없는 까닭은 개별적이고 산발적인 데에 있는 것 같다.

 

-지역의 가치는 많다. 지역에서 이런 것들을 찾아내고 영상이나 텍스트로 기록하고 대를 이어 전승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얼마나 폼나고 가치로운 일이냐. 이제는 이게 공공의 인식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이런 일을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적으로 뜨고 있는 K-컬처의 지속가능성과도 관련되어 있다. 한국 문화의 다양성과 생명력은 각 지역의 로컬리티를 얼마나 풍부하게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지역이 가진 다양한 문화자산을 구술, 자료 수집, 기록, 아카이빙해서 보전해야 한다. 한국 문화가 다양한 서사와 문화예술 콘텐츠 창출을 할 수 있느냐 여부가 달린 작업이다. 문화원, 문화재단, 자치단체 행정단위에서 하고 있지만 산발적 시도로 그쳐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을 전담하는 공무원 직렬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명칭은 지역문화사지역문예사든 상관없다. 전국 모든 지방자치단체 읍··동 단위까지 1명 이상 배치해야 한다. 실현하기 어렵다고 여기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30년 전 사회복지직이 만들어졌을 때를 떠올리면 된다. 그때 사회복지직이 하는 일도 없고 빈둥빈둥 놀기만 한다고 비판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과도기의 문제였을 뿐이고 지금은 사회복지직이 하는 일이 얼마나 많나. 일선 창구 업무의 태반이 사회복지 관련이다.

 

=‘지역문화사’(가칭) 직렬이 만들어지면 진짜 좋을 것 같다.

-이런 직렬을 만들면 지역의 사람·자연·문화·역사에서 고유한 로컬리티를 발굴하고 서사를 엮는 작업을 체계적·전국적으로 할 수 있다. 다른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지역이 소멸되는 까닭이 무엇인가? 먹고 살 만한 가치있는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청년 일자리 창출을 이걸로 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역의 대학들에서 여러 관련 학과도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인력 수요가 생겨나면 지역 대학들은 그런 인력을 양성해 공급한다. 일석사조 아니라 일석오조의 효과를 낸다.

첫째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둘째 지방 대학이 활성화된다. 셋째 지역사회에 생기가 돌며 넷째 지역의 로컬리티와 서사가 풍성해진다. 다섯째로 한국 문화의 기초 체력이 튼튼해진다.

이렇게 폼나는 일인데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먼저 시작해놓고 봐야 한다. 다른 관련 기관들과 업무 중첩은 조정하면 되고 여타 예상되는 부작용은 과도기로 여기고 겪어내면 그만이다. 지역을 살릴 수 있도록 하는 매우 중요한 시도가 될 수 있다.

 

=지역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뜻을 함께하면 좋겠다.

추진위원회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전국에 얼마나 많은 우주의 중심이 있는가. 하나로 힘을 합하면 무엇인들 못하겠나.

 

** '오마이뉴스'에 2월 28일에 <'인사 최고 작품' 청문회장에서 칭찬 일색... 그가 돌아왔다>는 제목으로 실린 기사가 있습니다. 이 글은 그 기사의 원문에 해당합니다. '오마이뉴스'에는 너무 길어서 뭉텅 잘라내고 실었습니다. 곰곰 읽어보시면 더 많은 재미와 의미를 느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