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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나는 영화 ‘파묘’가 불편했다

 

 

영화 파묘를 보았다. 이승만에 대한 가짜뉴스를 영화로 퍼뜨리는 어떤 감독이 좌파들이나 보는 영화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래? 그렇다면 나도 봐줘야지하는 마음으로 동네 영화관으로 갔다. 나는 지난 40년 넘는 세월 동안 한결같이 좌파였다.

장재현 감독

 

1. 처음에는 제법 몰입이 되었는데

편하게 자리에 앉아 보는데 처음에는 제법 몰입이 되었다. 우리나라 토속 신앙 풍수가 펼쳐지는 도입부는 대단했다. 일제강점기에 엄청나게 누렸던 친일파의 후손으로 미국서도 최상류인 밑도 끝도 없는 부자집안 이야기라기에 기대는 더욱 커졌다.

 

나아가 대한민국 0.1% 상류층에게 풍수는 절대적인 신앙이라는 식의 멘트가 터져나올 때는 더욱 그랬다. 그들이 부귀영화를 영원히 누리려고 저지르는, 그러면서 보통 사람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신세계가 그로테스크하게 펼쳐지지 않을까 기대가 되었다.

 

풍수 김상덕, 장의사 고영근, 무당 이화림, 고수(鼓手) 윤봉길 등 주인공의 연기 또한 대단했다. 친일파의 후손 박지용과 그 고모, 그리고 보국사의 보살 등 조역들도 볼만했다. 그들의 연기는 모두 끝까지 눈길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빼어났다.

주인공들. 왼쪽부터 장의사 고영근, 고수 윤봉길 무당 이화림 풍수 김상덕.

 

2. 마지막은 기억조차 남지 않더라

그런데 갈수록 집중이 되지 않았다. 연기는 세련되게 펼쳐졌지만 초반을 넘기면서부터 조금씩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아마도 첩장’, ‘쇠말뚝’, ‘수호 정령이런 얘기가 등장하면서부터였지 싶다.

 

이거 너무 뻔한 영화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이미 수백 번은 우려먹은 상투였다. 영화는 시시해졌고 마음은 불편해졌다.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지켜보았는데도 마지막 마무리가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친일파 무덤의 파묘를 통해 풍수와 무당 또는 우리 무속 신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영화는 일본 정령이 난폭하게 설쳐대는 장면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그 탓에 영화에 대한 집중력은 갈수록 떨어졌다.

굿판을 벌이기 전에 제물을 진설해 놓은 모습

 

3. 쇠말뚝은 오랫동안 정설이었다

파묘는 일제가 우리 민족정기를 말살하려고 쇠말뚝을 박았다는 데에 바탕하고 있다. 영화는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고 표현했다. 핵심 소재인 친일파의 무덤도 알고 봤더니 일제가 쇠말뚝을 박은 위에 일본 수호 정령을 심고도 모자라 한 번 더 둘러씌운 것이었다.

 

감독 장재현은 어느 인터뷰에서 일제 쇠말뚝 민족정기 말살론을 두고 가설이라고 했다. 영화에서는 풍수 상덕과 장의사 영근이 주고받는 대화로 나온다. 영근은 그거 99% 거짓말이잖아라 하고 상덕은 그렇다 해도 나머지 1%는 어쩔 건데하는 식으로 받아친다.

 

돌이켜보면 이 일제 쇠말뚝 민족정기 말살론은 오랫동안 정설이었다. 그래서 뽑아 없애야 한다는 여론이 크게 일기도 했었다. 내 기억으로는 1980년대에 형성되고 1990년대에 절정에 이르러 2000년대와 2010년대 중반까지도 그 기세가 이어졌다.

 

지금도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당시 기사가 여기저기 남아 있다. 조중동과 한겨레·경향, 그리고 KBSMBC를 가리지 않고 다들 쇠말뚝 뽑는 장면을 큼지막하게 보도했다. 이런 작업을 전문으로 하는 무슨 민족정신선양위원회나 쇠말뚝뽑기운동본부 같은 것도 있었다.

이화림의 굿판

 

4. 민족정기 말살용 쇠말뚝은 없었다

그러다 2010년대 후반에 들어서 일제가 민족정기 말살을 위해 쇠말뚝을 박은 적은 없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당시까지 일제 쇠말뚝으로 보도된 대부분은 측량을 위한 것이었고 심지어 일부는 해방 이후에 박은 쇠말뚝도 있었다.(물론 측량용이라 해도 일제가 박은 쇠말뚝이라서 께름칙하니까 뽑아내자고 하면 누구나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이렇게 결론이 난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이를 뒷받침하는 일제의 기록이 전무하다. 일본은 우리나라 못지않게 기록을 많이 남기는 민족이다. 그런데도 일제 40년 동안 생산된 문서에서 이를 입증하는 기록은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둘째는 일본은 풍수지리설을 믿지 않는다. 땅에 혈()과 맥()이 있고 그런 지기(地氣)에 따라 인간 세상의 길흉화복이 영향을 받는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들이 숱한 경비와 물심양면의 노고까지 들여서 일부러 쇠말뚝을 박아야 하는 까닭은 없다.

 

물론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풍수와 귀신 등에 대해 체계적으로 꼼꼼하게 조사했고 그 내용은 책으로 펴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식민 통치에 활용하기 위해서였지 풍수와 귀신을 믿거나 존중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 가장 연기가 멋졌던 봉길

 

5. 일제의 우리에 대한 기본 태도는 능멸과 무시

셋째는 일제는 우리 한민족을 두려움이나 경계의 대상으로 여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일제가 민족정기 말살을 위해 쇠말뚝을 받았다면 그것은 그들이 조선 사람들이 민족정기를 되찾을까 봐 두려워하거나 걱정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 민족을 대하는 기본 태도는 경멸과 무시였다. 자기네와 견주었을 때 모든 면에서 열등하고 무능한 족속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더럽다면서 능멸하고 지능이 떨어진다면서 멸시하고 게으르다면서 차별했다.

 

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일제강점기 진해 신시가지 입구에 세웠던 입입금지(立入禁止)’ 표지석이다. 일제는 진해를 빼앗아 해군기지를 설치하고 그 배후시설로 신시가지를 건설했다. 예전부터 거기에 살던 조선 사람들은 주변 지역으로 내쫓았음은 물론이다.

 

일본말 입입금지는 우리말로 출입금지다. 왜 그랬을까? 군사 기밀 보안을 위해서도 아니었고 질서 유지 치안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진해박물관에 남아 있는 당시 기록에 따르면 위생상 문제였다. 더럽다고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면서 능멸을 일상화했던 것이다.

일제가 입입금지 표지석을 세우고 조선인 출입을 막았던 진해 신시가지의 현재 모습. 가운데 중원로터리를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뻗어나가는 도로가 보인다.

 

6. 국뽕은 애국주의와 다르다

국뽕애국주의는 구별되어야 한다. 있지도 않은 사실을 근거 없이 꾸며내어 민족과 국가를 떠받드는 것이 국뽕이라면 국가와 민족을 떠받들기 위한 과장이나 왜곡이 어느 정도 있다 해도 그 바탕에 실재하는 사실이 있다면 애국주의라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영화 파묘는 겉으로 일제 청산 또는 반일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잇속을 밝히는 국뽕장사에 지나지 않는다. 대다수 일반 대중을 상대로 없는 사실을 실재하는 진실인 양 믿도록 만드는 가짜뉴스다.

파묘

 

일제 쇠말뚝 민족정기 말살론을 두고 한편으로는 가설이라 하면서도 실제로는 역사적 사실인 듯이 스토리를 진행한 것이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영화 파묘는 별 생각 없이 그냥 즐기기 위해 보는 오락 영화로는 100점짜리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하지만 역사적 맥락이 있고 거기서 어떤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이라는 기준으로 본다면 40점에도 미치기 어렵다고 본다. 그나마 40점이라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오로지 출연 배우들의 연기가 그만큼 탄탄한 덕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다만 김고은=이화림은 무당이라기보다 무당집 딸 같아 보여서 그만큼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