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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나는 영화 파묘가 불편했다’ 이후

나는 영화 파묘가 불편했다는 글을 쓰고 나서 욕을 많이 먹었다. 물론 공감과 격려도 조금은 있었다. 이쪽저쪽 모두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올린다. 돌이켜보니 좀더 정확하게 쓸 수도 있었는데 마음이 급하다 보니 그렇게 하지 못한 구석도 있었다. 다 내 잘못이고 내 탓이다. 반성(反省)이라는 말뜻 그대로 많이 돌아보며 살펴보고 있다.

 

1. 경멸은 쇠말뚝과 무관하다

글을 읽어보시고 여러 분들이 댓글을 달아주셨다. 하나하나 모두 대답해 드려야 마땅하겠지만 어쩌면 무의미한 노릇일 것 같아 세 개를 추려 말씀을 올릴까 한다.

 

첫째는 “‘일제는 우리를 더럽게 여기고 경멸했는데 왜 쇠말뚝을 박느냐?’고 했는데 그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들이 우리를 경멸했기 때문에 쇠말뚝을 박지 않았다고 적은 적이 없다.

 

나는 일제가 우리를 두려움이나 경계의 대상으로 여긴 적이 없기 때문에 쇠말뚝도 박지 않았다고 했다. 그들이 우리를 능멸하고 무시했다는 말은 그에 대한 방증으로 덧붙인 것이었다. 두려워하지도 경계하지도 않았는데 무엇 때문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여 가성비 나오지 않는 쇠말뚝을 박았겠느냐는 얘기다.

 

2. 기록 없는 지배가 더 대단한 능력

둘째는 이런 내용이다. “일제는 731세균전 부대와 일본군 위안부 관련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민족정기 말살용 쇠말뚝 박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므로 기록이 없다는 것을 갖고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느냐?”

중국 지린성 기록보관소가 일본 관동군이 땅속에 묻고 간 731부대 관련 문서 속에서 발견했다며 공개한 사진. 일본의 만주국 민생부 보건국 직원들이 1940년 11월 지린성 눙안현에서 한 어린이에게 페스트 방역하는 모습. 사진 신화망. 슬로우뉴스가 한국일보에서 재인용한 것을 다시 가져왔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일제가 기록을 남기지 않고도 식민 지배를 할 수 있었다면 그야말로 엄청 뛰어난 능력이다. 문서를 생산하지 않고는 지배를 할 수 없었고 실제로도 731부대나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한 기록을 방대하게 남겼다. 1945년 패전 이후 이런 기록을 말살하려 했고 많은 부분이 없어졌지만 남은 것도 적지 않고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새롭게 드러난 부분도 늘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지적은 무엇에 대해서도 근거로 삼을 수 없는 거짓말이다.

 

3. 조선총독부 청사는 그러면

마지막 셋째는 알아보기 쉽게 정리하면 이렇다. “조선총독부 청사의 위치와 모양을 보면 그들이 저지른 풍수 침략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경복궁 일부를 허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고 그것을 위해서 내려다보면 일본을 뜻하는 일()자 모양이다. 광화문 일대 거리 조성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대충 말하면 이렇다. 먼저 경복궁 일부를 허문 것과 직접 관련이 있는 사건은 1915년의 조선물산공진회였다. 그때 허문 자리에다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세운 시기는 1920년대였다. 그전에 조선총독부는 다른 데에 있었다.

 

총독부 청사의 일()자 모양은 일본을 뜻한다고 볼 소지가 있지만 팩트라 하기는 어렵다. 당시 세계 건축의 흐름에서 공공기관을 그렇게 공간을 두고 짓는 것이 주류였다. 관련해서 내가 사는 창원의 진해 신시가지의 방사상 도로도 욱일기를 본뜬 것이라는 얘기가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당시 통행이 가장 원활한 도로 양식이라 그렇게 설치했다.

 

다음 광화문 일대 신작로 조성은 일제와 직접 관련이 없다. 대한제국 시기 고종 정부가 주관해서 진행했다. 이 또한 당시의 세계적인 추세였던 방사상 구조를 따르려다 예산이 모자라 제대로 못했을 뿐 일제의 의도와는 무관하다.(이런 부분은 사실 내게 물을 일은 아니다. 인터넷이나 관련 연구 논문을 검색하면 금세 알 수 있다.)

 

4. 욕먹을 줄 알면서도 글을 쓴 까닭

많은 이들이 욕할 줄 알면서도 글을 쓴 데는 까닭이 있다. 227일 보고 나서 자칫 잘못하면 많은 이들이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용 쇠말뚝 박기를 팩트로 인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영화평 또는 소감에서 그런 글들이 많이 나왔다. 그래도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지나가는 소나기 잠깐 처마 밑에서 피하면 그만이지하는 생각이 더 강했었다.

 

그런데 이것이 바뀌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31일 오후 MBC에서 이런 뉴스가 나왔다. “1994년부터 일어난 쇠말뚝뽑기운동.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했을 때 백두대간의 정기가 흐르는 곳마다 쇠말뚝을 박아놓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습니다.” ‘파묘가 현실이라는 얘기였다.

예사일이 아니네싶었다. 한 번 터지기 시작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모두 집어삼키는 것이 우리나라 보도매체의 속성인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는 사태가 벌어질 것 같았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역사에 대한 인식에 혼란이 커질 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더불어 사회적 비용의 낭비도 심해진다. 30년 전 상황을 되살려 보면 바로 짐작할 수 있다. 민족정기선양위원회라든지 쇠말뚝뽑기운동본부 등이 만들어지는 것은 시간문제고 대부분 사람들은 저마다 한두 마디씩 얹을 것이며 인터넷을 비롯한 사회적 공론장은 이에 관한 얘기들로 가득 찰 것이다.

 

그런데, 그게 팩트가 아니라면 이 얼마나 허망한 노릇인가.

 

5. 이 정도면 되었다

그래서 서둘러 글을 써서 밤 10시 넘은 시각에 페이스북에 올렸다. 3일에는 슬로우뉴스에서도 채택해 주어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지역사회에서도 작으나마 관심을 받게 되었고 5일 저녁 MBC경남 뉴스파다에도 출연하게 되었다.

 

어쨌거나 지금 인터넷에는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용 쇠말뚝 박기는 역사적 사실이었다고 하는 얘기는 그다지 많지 않다. 같은 부류의 신문·방송·통신 보도도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나는 이것으로 되었다. 이정환 슬로우뉴스대표가 언급한대로 영화적 상상력과는 별개로, 아닌 건 아닌 거다라는 얘기다. 사회적 비용의 불필요한 지출을 막는 데 조금이나마 이바지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6. 덧붙임 : 호사카 유지 교수 유감

내 페이스북에 어떤 분이 호사카 유지 교수가 쓰신 글을 댓글로 붙여주셨다. 보니까 내 글에 대한 반박인 것 같았다. 거기에는 이런 대목이 들어 있다.

 

“194112월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본의 군부는 음양사들을 시켜 저주의 힘으로 미영 연합군이 불타서 전멸하도록 매일 열렬하게 저주를 올리게 했다. 이런 이야기는 모두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고 조금 뒤에 이렇게 붙였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한반도를 지배하기 위해 영화처럼 음양사들을 시켜 한반도에 주술적 공작을 펼쳤을 것이다. 그 당시 음양도는 일본의 국책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이 글에서 미국·영국에 대해서는 사실로 말했지만 한반도에 대해서는 짐작으로 말했다. 근거는 객관적 사실을 적시하는 대신 자신의 주관적 판단으로 대체했다.

 

이것은 내가 알기로 학자의 글쓰기가 아니고 평론가의 글쓰기다. 그분은 대학에서 학문을 공부하는 학자이지 평론가가 아니다내가 아는 학자는 어떤 서술에서 다른 서술로 넘어갈 때 사실을 징검다리로 삼을 따름이지 비약을 징검다리로 삼지는 않는다. 사실은 평론가도 2류 정도만 되면 비약을 바탕으로 논리를 전개하지는 않는다.

 

제대로라면 이렇게 해야 한다.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일제가 저주를 퍼부었다고? 그러면 조선에 대해서도 그렇게 했는지 한 번 알아보아야 하겠네. 제대로 확인하려면 일본 정부와 미국 정부의 비밀 해제 문서부터 살펴야겠지? 글은 그러고 나서 쓰면 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