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간다는 말은
살아있는 책을 보러 간다는 말
나뭇잎에 햇볕이 쓴 편지 읽으러 간다는 말
궁금한 것 많은 개미를 따라 포플러 한 그루를
줄기에서 가지 끝까지 정독하겠다는 말
사람들이 다니는 길은 밑줄
바쁜 벌레들은 살아있는 느낌표
한 번씩 만나는 뱀은 이것도 보라는 각주
부러진 가지의 붉은 색은 한 번 더 보라는 강조
새들은 이해하기 힘든 문장을 읽어주는 독서 도우미
모기들은 한자리에 앉아서 게으름 피지 말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라는 독서실 감독
내일 읽을 신간을 준비하느라
숲이 서재의 스위치를 끄면
하늘은 더듬더듬 점자책을 펴며
집까지 따라온다.
-----'산책 간다', 이원만
이원만은 몇 안 되는 내 영혼의 친구 가운데 한 명이다. 그가 이번에 등단을 했다고 알려왔다.
고등학교 때 이미 촉망 받는 청소년 시인이었으니 예정된 일이 너무 늦게 실현되었다. 하지만 지난 40년 가까운 세월을 시인이라는 관형어 따위에 매달리지 않고 세상을 위해 살아왔기에 아쉬워할 일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나도 한때는 시인이었다. 공동으로 시집을 내기까지 했지만 시를 잘 못 쓰는 시인이었다. 나는 도저히 좋은 시를 쓸 수가 없어 그 어려운 노릇을 오래 전에 깨끗이 포기했다. 대신 독자가 되어 아쉽지만 편하게 살기로 마음 먹었다.
여태 나는 시인 선배와 시인 후배는 있었지만 시인 친구는 없었다. 이번에 이원만 덕분에 나는 시인 친구 보유자가 되었다. 내 친구의 시는 사람을 즐겁게 한다.
---2023년 6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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