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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영화 '밀수' 훌륭하다 싶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영화 '밀수', 재미있었다. 이 정도면 훌륭하다 싶다. 나의 쓸세권 끝자락에 영화관이 하나 있다. 거기서 드러누워 봤는데 몰입도는 높아졌지만 이 세상 같이 느껴지지는 않더라. 다음에는 쓰레빠 신기 전에 맥주도 두어 캔 챙겨 가야지.

 

1. 여름철 흥행에 딱 맞는 영화

왜냐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가 배경이기 때문이다. 누군들 시원하지 않을까. 어쩌면 저 넘쳐나는 바다가 주인공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아 통통배는 아쉬웠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내 기억으로 그때 통통배는 이런 정도까지 빠르지는 않았다. 옛날 속도로 갔더라면 바다 풍경이 조금 더 멋드러지게 연출되지 않았으려나 모르겠다.

 

해녀들 옷차림도 멋스러웠다. 흑백이 그렇게 잘 조화되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을 왜 여태 못했을까. 검은 고무 잠수복이나 알록달록한 비키니 차림이었다면 저렇게 잘 어울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2. 의리는 여자가 있지

남자가 의리의 세계를 사는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남자들이 사는 세상은 권모술수가 어지럽게 날린다. 그것도 인류를 구하는 그런 책략이라면 용서가 되겠지만 거의 전부는 절대 그렇지 않다. 자기 앞길 30m 내다보는 잔대가리일 따름이다.

 

여자는 남자인 내가 보기에 자기네끼리 공유하는 바가 많다. 바로 그 자리가 의리의 터전이다. 여자는 또 세상에서 당하는 바가 많다. 그래서 여자들은 함께 느끼는 정서가 있는데 서러움이다. 이 또한 의리의 터전이다.

 

3. 결국 이기는 것은 여자다

남자도 대화를 하고 여자도 대화를 한다. 그러나 그 속내는 다르다. 남자는 대화로 싸움을 하고 여자는 대화로 소통을 한다. 남자는 상대를 이기려는 궁리를 하고 여자는 상대와 공감을 이루려 한다. 그러므로 남자는 여자를 이길 수 없다.

 

남자는 힘이 세고 여자는 힘이 약하다. 남자는 뭐든지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여자는 서로 힘을 모으지 못하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안다. 힘이 약하기 때문에 이기는 역설이 여기에 있다.

 

물 속 남자들과 여자들의 싸움에서 잘 나타난다. 바닷속이라는 조건이다 보니 여자들은 혼자서도 잘 싸우지만 둘이 셋이서는 더 잘 싸운다. 반면 남자는 물 속 싸움에서도 여자라고 얕보고 혼자 설친다. 그런데 다구리는 징기스칸도 이겨내지 못한다.

 

4. 대규모 범죄는 공권력과 결탁되어 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걸면 걸리고 안 걸면 안 걸린다. 걸면 걸리는 것도 무섭고 안 걸면 안 걸리는 것도 무섭다. 거는 게 필요하면 걸고 안 거는 게 필요하면 안 건다. 공권력은 손쉽게 사권력으로 전환된다.(그래서 고속도로도 휘게 한..)

 

세관 이계장은 밀수꾼과 붙어 먹었다. 더 많은 이득을 위해 직접 개입하기도 한다. 바다가 간혹 피비린내를 풍기는 것은 바로 그들 때문이다. 그러다가 자신의 피 때문에 푸른 바다가 벌겋게 물들 때도 있다.

 

5. 모든 배우들의 연기가 좋았다

특히 염정아. 중고등학교 다닐 때 보면 반장보다 더 강렬한 카리스마를 장착한 부반장이 간혹 있었다. 이번에 염정아가 꼭 그런 모습이었다. 상투적인 구석이 조금은 있었지만 그마저도 잘 기획된 전체의 한 부분으로 여겨졌다. 그동안 김혜수만 좋아해서 "미안해".

 

그리고 세관 이계장. 비열함이 일상이 된 얼굴 표정이 압권이었다. 이보다 더 자연스러운 비열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적당히 눙치는 전라도 사투리는 몹시 그럴듯했다.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전형화해서 듣는 찰진 전라도 사투리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상황 정합성이 있었다.

 

6. "어째 그러냐" 자꾸 눈물이 나려고 했다

그때 그 시절 노래들이 많이 나와서 그런 측면도 있을 것이다. 왜 그렇게 마음이 스산해지고 눈물이 나려고 하던지. 조춘자 얼굴을 보아도 그랬고 엄진숙 얼굴을 보아도 그랬다. 피부가 탱글탱글하지 않고 조금 쪼글쪼글해서 더욱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한 번씩 깊은 호흡을 나도 모르게 하면서 보게 되었는데 그러면 더욱 슬펐다. 70년대 사무실과 다방과 옷가게와 병원과 살림집과 공판장은 이제 가뭇없이 사라졌다. 나도 저기 어느 구석 끝자락에 10대 청소년으로 있었었는데.

 

지금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 사라져 갈 것이다. 아울러 나 또한 이르거나 늦거나간에 없어질 것이다. 옛날 영화를 보면 이런 생각이 더욱 생생해진다. 지금은 이것이 나를 슬프게 만드는데 언젠가는 이것이 무덤덤해지면 좋겠다.

 

7. 권상사가 살아 있다

조인성이 맡은 역할이다. 사람들이 왜 조인성 조인성 하는지 오늘에야 알았다. 그때 월남에서 돌아온 것이 김상사 말고 권상사도 있다는 것도 오늘에야 알았다. 어릴 적 한때는 월남에서 돌아오면 누구나 상사 계급장 다는 줄 알았다.

 

싸움 도중에 왼쪽 가슴을 찔려 죽었는 줄 알았는데 마지막에 보니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병상에 앉아 밥에 김을 얹어 먹는 장면(사실을 말하자면 70년대에는 저렇게 규격에 맞게 잘라진 김은 없었다)인데, "이게 뭐지?" 싶었다. 그런데 돌아오면서 생각해 보니까 그것이야말로 '큰 그림의 완성'이었다. 죽은 척하는 것조차 다 계획된 것이었던 것이다.

 

이런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랑 동시대를 산다는 것은 내게 절대 작은 행복이 아니다.

 

-- 2023년 8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