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형배 헌법재판관의 퇴임에 부쳐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는 말이 있다. 공자는 정치란 식량과 군대를 충분하게 하고 백성의 믿음을 얻는 일이라 했다. 제자 자공이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이냐고 묻자 공자는 군사라 했다. 다시 둘 중 하나를 포기한다면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식량이라 답했다. 그러고 덧붙이기를 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국가는 존립할 수 없다(民無信不立)고 했다. 잘 사는 경제나 나라를 지키는 국방보다 국민의 신뢰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목지신(移木之信)도 있다. 진나라 관리 상앙은 새 법 시행에 앞서 나무를 남문에 세우고 북문으로 옮기면 10금을 주겠다고 했다. 별것도 아닌데 큰 상금이 걸려 미심쩍었는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상금을 50금으로 올렸다. 속는 셈 치고 어떤 사람이 옮기자 즉각 50금을 주어 나라를 믿도록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새 법을 널리 알리고 시행에 들어갔다.
윤석열이 비상계엄으로 내란을 일으킨 12월 3일부터 줄곧 무너져내린 것이 바로 이 믿음이었다. 현직 대통령이 주권자인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들이댈 줄 그 누가 알았는가. 아무리 난폭해도 대통령이라면 헌법과 법률만큼은 지킬 것이라는 국민의 믿음을 그는 통째 허물었다.
믿음의 붕괴는 도미노처럼 진행되었다. 법원은 불법한 판단으로 그의 구속을 취소했고 검찰은 법률이 정한 즉시 항고를 포기함으로써 석방을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가장 위험한 인간을 이렇게 풀어주리라고는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국무총리와 부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들도 내란 국면에서 갖가지 불법으로 국민의 믿음을 확실히 갉아먹었다.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을 기각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극심한 불안에 모든 국민이 가위눌렸다. 이렇게 된 데에는 헌재의 선고 지연도 한몫했다. 5대3 또는 4대4 기각 얘기가 퍼지면서 엄청난 혼란이 휘몰아쳤다. 헌재 소장 권한대행인 문형배가 지역법관이라 서울 법관인 재판관들이 무시하는 바람에 평결을 제대로 못 이끈다는 억측까지 나돌았다.
그러나 결국 헌재는 파면 결정으로 무너진 믿음을 일으켜세웠다. “피소추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주문을 읽는 문 대행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결정문의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문장과 8대0이라는 완전무결한 숫자는 더욱 큰 울림을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문 대행은 8인 8색으로 제각각인 재판관들의 평결을 잘 이끌어내었다.
게다가 문 대행과 김장하 선생의 아름다운 인연에 눈길이 쏠리면서 많은 이들이 ‘그러면 그렇지’ 하고 무릎을 쳤다. 사후적이지만 이로 말미암아 전원일치 파면 결정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이는 무너진 믿음을 세우는 데 작지 않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문형배가 오늘 퇴임한다. 문형배와 그의 헌법재판소가 다시 세운 믿음 위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헌재 결정으로 윤석열의 내란죄는 확정되었다. 남은 것은 내란 수괴의 형량이다. 무기징역 또는 사형인데 법원에 맡겨두었다 판결이 나오면 존중만 하고 말 일은 아니다. 주권자인 국민이 공론화하고 그 결과를 법원이 따르도록 해야 한다.
앞서 말한 이목지신의 남은 얘기는 이렇다. 시행 1년이 지난 시점에 태자가 새 법을 어겼다. 상앙은 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는 것은 위에서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며 태자를 처벌하려 했다. 하지만 군주의 뒤를 이을 태자에게 그렇게 하기란 어려웠다. 대신 태자 스승을 목 베고 임금 스승에게는 이마에 글자를 새기는 형벌을 내렸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두 새 법을 지키게 되었다.
### <경남도민일보>에 실은 글입니다.
'그냥'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형배 이야기 ⑧부채의식 (0) | 2025.04.21 |
---|---|
문형배 이야기 ⑦진심 (1) | 2025.04.19 |
김건희는 왜 아직도 ‘여사’인가 (1) | 2025.04.19 |
문형배 이야기 ⑥보수주의자 (1) | 2025.04.19 |
문형배 이야기 ⑤지역법관 (0) | 2025.04.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