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창녕

거대한 뿌리를 보았네

 

나는 거대한 뿌리를 보았다.

 

1.

경남 창녕군 유어면 세진리 우포늪생태관이 있는 쪽 출입구에서 우포늪으로 들어간 다음 우포늪과 마주쳐서 왼쪽으로 길 따라 가다보면 양쪽에 나타난다. 하나는 육지 쪽에서 바위를 갈랐고 다른 하나는 물 쪽에서 한 길 건너뛰어 또다른 나무를 뻗어냈다.

 

2.

경남 고성군 마암면 마동호갯벌 근처에서도 보았다. 삼락리 554 일대 언덕배기에 있는데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다시 거기서 왼쪽 아래로 흐르면서 바위를 쪼갰다. 여기 일대는 퇴적암 해식애가 발달하여 줄줄이 이어지면서 색다른 경관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해식애가 한참 동안 줄줄이 이어진다. 저기에 새겨진 지구의 세월이 얼마냐.

 

3.

우리집 근처에도 있더라.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안계마을 뒤편 서재골인데 지번은 삼계리 1363이다. 아주 멋졌다. 여름에 옆에 개울물이라도 흐를 양이면 거대한 뿌리가 솟아올린 그늘이 무척 풍성하지 않겠느냐.

 

4.

나는 이런 거대한 뿌리를 볼 때마다 김수영 시인의 시 거대한 뿌리가 떠오른다.

그러면서 세상 만사 어떤 세력과도 맞붙어 싸워 이길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에 사로잡힌다.

저런 거대한 뿌리가 아니고 한해살이 잡초의 털뿌리일 뿐인데도 그렇다.

 

거대한 뿌리

김수영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 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15 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 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 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强者)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도 한 번도 장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寅煥)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10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커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