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창녕

창녕에는 전두환 조상을 기리는 탑비가 세 개 있다

 

1. 남산호국공원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는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로 유명한 만년교가 있다. 남산호국공원 들머리에 있는데 이 다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사시사철 많은 이들이 찾아온다.

 

만년교를 지나 안에 들어가면 엉뚱한 시설물들이 나온다. 임진왜란호국충혼탑이 가장 먼저 눈에 띄고 임진왜란화왕산승전도와 전제장군충절사적비도 잇따라 보인다.

 

처음 찾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한다. 세 가지 시설물에서 빠짐없이 나오는 전제 장군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다. 당연하다. 의병 활동을 한 것은 맞지만 이렇게 크게 모실 인물은 아니다. 

 

게다가 여기 적혀 있는 내용은 대부분이 가짜뉴스다. 중요한 대목만 추려서 한 번 살펴보겠다. 이 탑비들은 1982년 5월 31일 준공되었다.

영산현감전제장군충절사적비

 

2. 영산현감전제장군충절사적비

①임진왜란 당시 영산현감은 전제장군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영산현감은 황정복이었다. 전제는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영산현감이었다.

 

②전제가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인물은 곽재우 장군이다. 전제는 그 뒤 합천 초계에서 당숙 전치원 아래에 있으면서 조호장(調護將)으로 의병 활동에 나섰다.

 

③배대유·이도자와 군무를 함께 보았다.

→배대유·이도자는 영산 출신이다. 영산과의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한 가짜뉴스다. 본인의 행장·묘갈명에 따르면 이도자는 노모와 피란했고 배대유는 이영과 화왕산성에 있었다.

 

④박진에서 왜적을 수만 명 섬멸했다(1592년).

→1592년에는 박진에서 전투가 없었다. <선조(수정)실록>은 물론이고 <경상순영록>·<고대일록>·<쇄미록>·<난중잡록> 같은 당대의 기록 어디에도 박진은 나오지 않는다.

 

→‘수만 명 섬멸’도 말이 안 된다. 육지에서 최초 승전인 곽재우 장군의 기강전투가 왜적을 한 명도 죽이지 못한 채 다만 적선 14척을 물리쳤을 정도였다. 개전 초기 조선은 지리멸렬한 상태였는데 수만을 섬멸했다면 당대의 모든 기록에 나오지 않을 리가 없다.

 

※박진(泊津:지방도 1008호 선상의 박진교 좌우 일대. 창녕·영산과 의령을 잇는 나루가 양쪽에 있었다.)

 

⑤의령 정암싸움에서 대첩을 거두었다.(1592년)

→의령 정암진 전투는 의령이 본진인 곽재우 장군의 단독 작전이었다. 의병들도 다들 자기 영역이 있었다. 전제 장군의 활동 영역은 초계 일대였다.

 

⑥정유재란 당시 창녕 화왕산성에서 왜적 수천 명을 목 베었다.

→화왕산성에서는 전투가 없었다. 곽재우를 주장(主將)으로 수성전만 있었다. 가토기요마사 부대가 왔으나 하루 밤낮을 대치하다가 물러났다. 당시 조선 조정은 모든 들판을 비우고 산성에 들어가 농성하는 전략을 채택했었다.

 

⑦박진과 정암진 사이에서 왜적을 크게 죽였다(1597년).

→가토기요마사 부대는 함양·남원을 향해 이동했다. 박진과 정암진에는 당시 왜적이 없었다. 싸우고 싶어도 거기에는 싸울 상대가 없었다.

 

⑧정유재란 당시 12월 26일 울산 도산전투에서 선봉이 되어 싸우던 도중 아군인 이사종의 모해를 받아 죽었다.

→<선조실록> 1598년 1월 6일자에는 “1597년 12월 26일 권율 도원수가 영산현감 전제의 머리를 베고 조리돌렸다”고 적혀 있다.

 

이후 배대유가 ‘영산현감 전제의 신원을 요청하는 상소’에서 “전제가 당일 앞장서서 싸우고 있는데 이사종과 그 무리가 뒤에서 어지럽게 찔러 죽였다”고 했다. 이사종은 명령 없이 후퇴하는 아군을 베는 임무를 맡은 군관이었다.

 

3. 호국충혼탑과 화왕산승전도

⑨임진왜란호국충혼탑에는 “전제 장군과 더불어 큰 공을 세우고 장렬히 순국한 수많은 장령들을 비롯하여 진충호국의 이슬로 사라져간 무명용사의 영령을 추모하고 그 빛나는 공적을 길이 전하고자 삼가 이곳에 호국충혼탑을 세우다”라고 했다.

 

→정유재란 당시 화왕산성에서 있었던 상황을 기술한 것이다. 화왕산성 수성전의 중심은 곽재우 방어사였는데도 그가 지워져 있다. 영산현감 전제는 서열 5위 조전장이었을 따름이다.

임진왜란호국충혼탑

 

⑩화왕산승전도에는 의병장 전제가 크게 부각되어 있다. 중앙의 말을 타고 왜적을 무찌르는 인물 옆에 ‘의병장 전제’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다른 사람의 이름은 없다.

 

→이는 두 가지를 왜곡하고 있다. 먼저 화왕산성 활동의 중심이 곽재우였다는 것을 왜곡한다. 다음으로는 당시 화왕산성에서는 전투가 없었다는 것을 왜곡한다.

임진왜란화왕산승전도. 가운데 칼을 쳐든 이가 전제장군이다.
임진왜란화왕산승전도(부분). 칼을 쳐든 뒷쪽 깃발에 '의병장 전제'라고 적혀 있다.

4. 박희도=도희철

전제장군은 전두환의 14대 조상이다. 전두환을 위하여 이런 왜곡을 하고 탑비 셋을 들이세운 사람들이 있다.

 

전제장군충절사적비건립추진위원회 명단을 보면 박희도가 고문으로 들어 있다. 그는 '서울의 봄'에서 '도희철'로 나오는 창녕 출신이다. 박희도는 지금도 전두환 찬양을 하고 다닌다.

 

지역 국회의원 신상식·노태극과 창녕군수 황태조도 고문으로 이름을 올렸다. 준공 직전인 5월 25일까지 경남도지사를 했던 최종호는 호국충혼탑 비문을 썼다. 5월 31일 준공식에는 신임 이규효 도지사가 참석했는데 그는 기념식수 표지석에 이름을 남겼다.

 

당시 집행된 예산 총액은 3억2700만 원이었다. 이 가운데 나랏돈은 국비 2억 1100만원(특별지원금 1억6000만원 포함), 도비 3400만원, 군비 2200만원 등 2억6700만 원이고 나머지 6000만 원은 민간에서 걷었다.

전제장군충절사적비건립추진위원화 표지석.

5. 나는 부끄럽다

경남 창녕은 나의 고향이다. 전두환 기념물도 아닌 전두환 조상 기념물이 역사를 왜곡하면서 이렇게 고향에 42년 동안 존속한다는 것이 부끄럽다. 그동안 문제 제기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