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박근혜 때는 열일곱 번, 윤석열 때는 네 번
2016~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파면 때는 그래도 창원광장이든 서울 광화문이든 주말마다는 꼬박꼬박 집회에 나갔었다. 헤아려 보니 모두 열일곱 차례였다. 2024~25년 이번 윤석열 대통령 탄핵 파면 국면에서는 집회에 참여한 횟수를 꼽아보니 고작 네 차례였다. 8년 세월만큼 늙었기 때문인 것도 같고 기력이 줄어들었기 때문인 것도 같다.
2024년 12월 13일에는 창원 내서 동네 집회에 나갔고 탄핵 소추 당일인 12월 14일에는 창원광장 집회에 나갔다. 조금 뜸하다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 변론 종결 이후 선고가 하염없이 늦추어지던 3월 15일에는 창원광장 집회에 참여해 불안함과 갑갑함을 달랬다. 그래도 달라지지 않기에 광화문 집회에 머리라도 보태야겠다 싶어 4월 1일 오전 고속버스로 서울 가는 도중에 4월 4일로 선고가 잡혔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때 나는 기쁘면서도 맥이 좀 빠졌다. 선고 날짜만 정해지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결론은 헌법재판관 전원일치 파면으로 나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렇듯 긴장이 풀린 상태로 서울에 내려 찾아간 첫걸음은 헌법재판소 일대였다. 도대체 탄핵 반대 세력들은 어떻게 굴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2. 저들은 패배를 예감했고 우리는 승리를 예견했다
지하철 안국역에 내려 계단을 걸어 올라갔더니 아수라보다 심한 장소가 거기였다. 앵앵거리는 앰프, 갈라진 소리와 새된 소리로 외치는 낯선 구호들, 길 가는 사람들을 위협하듯 건들대는 몸짓 등등이 개별로 또는 무리 지어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생각하기를 저들은 이미 파면이 나올 줄 직감하여 저렇게 기를 쓰고 악을 쓰는구나 싶어서 가련하게 느껴졌다.
반면 같은 날 저녁 광화문 동십자각 탄핵 집회는 생동감으로 싱싱했고 여유가 넘쳐났으며 몸짓이 너그럽고 웃음도 곳곳에서 피어났다. 누군가가 패배를 예감하게 되면 다른 누군가는 승리를 예견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헌재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저들처럼 그렇게 그악스럽게 굴어야 할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3. 8년 전 거대한 뿌리를 보았다
이윽고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여기는 밤샘 집회를 하지만 나는 또 주변에 해야 할 일이 있어 밤차로 돌아와야 했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밤 11시 막차를 탔는데 몸이 고단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그래도 잠들어 보려고 눈을 감았더니 생각지도 않게 검은 스크린이 펼쳐지고 그 위로 8년 전 창원광장이 떠올랐다.
낯익은 얼굴들이 많았다. 옛날 1987년부터 1992년까지 창원공단 마산수출자유지역 등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함께했던 사람들이었다. 뜻밖이었다. 더러는 머리숱이 적어지고 얼굴과 목덜미에도 주름이 졌지만 10년 만에 20년 만에 만났어도 우리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는 웃으면서 얼싸안고 두 손을 맞잡았다.
다들 살아 있었구나, 저마다 자기 자리에서 자기 몫을 하면서 살았구나, 이렇게 나름 민주주의의 확산과 발전에 이바지했던 인생들이 다시 민주주의를 위하여 한 자리에 모였구나 하는 생각들이 들었더랬다. 아무도 미리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그렇게 10년 만에 20년 만에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지난날 민주주의 투쟁 경험을 공유하면서 맡겨진 자리에서 제 할 일을 하며 지내다 민주주의 위기의 순간에는 곧바로 광장으로 뛰어나오는 이런 사람들이 이 땅 곳곳에 있다면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절대 약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이렇게 뿌리가 굵고 튼튼하고 기다랗고 질기다. 시인 김수영이 노래했던 ‘거대한 뿌리’처럼…….
4. 이번에 어린 나무를 보았다
스크린은 조금 있더니 지난해 12월 13일의 동네 집회와 14일의 창원광장 집회로 옮아갔다. 8년 전 촛불이 지금은 응원봉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큰 특징으로 꼽지만 특히 13일에는 거의 전부가 촛불이었고 14일도 촛불이 적지는 않았다. 다만 거기에 앳된 소리와 젊은 몸짓이 많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나이가 많은 어른들은 “~~하라”라고 사뭇 근엄하게 구호를 외쳤다. 젊고 어린 친구들은 아랑곳없이 “~~해라”라고 구호를 외쳤다. 내 귀에는 그게 즐겁고 귀엽게 들렸다. “하라”가 문어투이고 “해라”가 구어투인 것을 나는 그때 제대로 알아차렸다. 나이 많은 어른들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젊은 친구들은 이렇게 말투조차 경쾌했다.
나는 고립되어 있지 않았다. 여기에서 저기로 이어지고 있었다. 내가 서 있었던 자리는 어린 나무가 새롭게 뿌리를 내리면서 연둣빛 새 잎을 피워올리는 현장이기도 했다. 젊고 어린 그들 덕분에 나는 동네 한 귀퉁이와 창원광장에서 누군가와 함께하고 있다는 든든함과 포근함을 내 것으로 삼을 수 있었다.
5. 못 본 얼굴도 있지만 쓸쓸하진 않았다
그런데 전에는 볼 수 있었던 사람인데 이번에 보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것은 누구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광장에 늘 나오던 얼굴, 언제나 먼저 함박웃음으로 맞아주던 얼굴 몇몇이 사라지고 없었다. 우리보다 먼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른 세상으로 떠나버려 앞으로도 영영 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세월이 흐르는구나. 산 사람이 살다가 죽는구나.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살아가는 사람은 산 사람이구나. 산 사람도 산 사람이 아니구나. 산 사람도 언젠가는 죽는 사람이구나. 나도 이제 먼저 떠난 선배·동기가 적지 않을 만큼이 되었구나. 대신 젊은 몸짓과 앳된 소리가 새롭게 광장을 채우고 있으니 많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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