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걱정이 많았다. 그의 공약과 발언 때문이다. 언론노조를 손보겠다느니 선제타격을 하겠다느니 사드 배치를 하겠다느니 핵발전을 늘리겠다느니 검찰 권한을 대폭 강화하겠다느니 등등 예사로운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정권 차원 보복 수사는 당연한 것으로 예고됐고 여성이 차별받는 현실은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으로 가리고 덮었다. 최저임금제를 손보고 주 5일 노동제를 무력화하고 해고의 자유를 넓히고 중대재해처벌법을 손질하고…에서는 공포스러울 지경이었다.
며칠 전까지는 아무리 공약이라 해도 실행은 않기를 바랐다. 공약이나 발언대로 하면 더 큰 폐해가 생긴다는 것을 얼른 깨닫고 없었던 걸로 삼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으로 옮기는 공약도 아닌 것을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은 곧바로 쓰레기통에 들어가고 말았다.
청와대는 대통령과 참모진의 거리가 멀어서 안 된다는 거짓말은 지나고 보니 차라리 애교에 가까웠다. 공간이 의식을 결정한다거나 청와대는 제왕적 권력의 상징이라는 구름 잡는 소리까지 근거랍시고 갖다 붙였다.
공간에 의식을 결정 당하지 않고 의식으로 공간을 바꾸는 능동적인 사람이 오히려 더 많았다. 노무현과 문재인 두 대통령은 공간의 한계를 넘어 참모들 있는 가까이로 일부러 다가갔다. 청와대가 제왕적 권력의 상징이라고?
박정희가 청와대 아닌 홍와대였으면 독재를 하지 않았을까? 그러면 전두환도 흑와대였으면 철권을 휘두르지 않았겠네? 어쩌면 저렇게 막무가내로 밀어붙일 수 있을까. 자기가 당선된 것이 대통령이 아니라 제왕이라고 착각을 한 걸까.
그런데 저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조마조마하던 마음이 오히려 조금씩 담담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좋다 오지게 한 번 당해보자. 윤석열 대통령의 역사적 소임은 민주주의의 적이 누구인지 만천하에 생생하게 보여주는 데 있다고 생각하자. 많은 사람이 힘들여 조금씩이나마 쌓아온 민주주의를 누가 어떻게 한꺼번에 허물고 마는지 잘 알 수 있는 기회로 삼자.
외람되지만, 지금 40대와 50대에게는 80년 오월 광주가 민주주의의 적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생생한 현실이었다. 그런 80년 오월 광주였지만 20대와 30대에게는 그냥 교과서에 실려 있는 역사적 사건일 따름이다. 그러니 여태 누려왔던 이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체험할 수 있는 현장 학습의 공간이 이제 다시 열렸다고 생각하자.
여태까지 봄은 단 한 차례도 직진한 적이 없다. 역류가 없는 강물도 없고 반동이 없는 역사도 없다. 시나브로 역사는 그렇게 진행하는 모양이다. 거짓말도 좋고 헛공약도 좋다. 어디 한 번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해 보시라. 그 속에서 교훈을 찾아 몸과 마음에 아프게 새길 수 있다면 이 또한 나쁘지 않겠다.
--- 2022년 3월 23일 ‘경남도민일보’에 실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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