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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이응인 시집 '은행잎 편지와 밤비 라디오'

이런 시가 나는 좋다. 이응인 시집 '은행잎 편지와 밤비 라디오'에 실려 있다.

언제쯤이면 나도 즐거이 개숫물이 될 수 있을까. 그 집 싱크대에서는 목련 나무가 창문 너머로 보일 것이다.

 

 

    창고 옆에 훌쩍 자란

    목련 나무를 베어 버리나 어쩌나

    삐죽하니 키만 크고 쓸모가 없어

    그래도 꽃 필 땐 환하고 좋잖아

    저기 살구나무 심으면 어때

    살구보다 단감나무 심어

    제 맘대로 떠들다가

    막내가 던진 한마디에 끝이 났다.

    목련 나무는 새들이 사는 집인데

    왜 우리 맘대로 해요?

                                                                          --- 가족회의

 

 

    마지막 접시를 씻고 나자

    어디선가 어슴푸레

    관악기 소리가 들렸다.

    남의 몸 말끔히 씻어 주고

    싱크대 하수구로 사라지는 개숫물

    시원하고 아득한 연주.

                                                                        --- 설거지 마칠 무렵

 

 

나는 이렇게 들었다. 책을 한 권 샀는데 거기서 마음에 와 닿는 문장이나 눈이 번쩍 떠지는 시를 하나만 얻어도 엄청난 행운이라고. 나는 이 시집에서 눈앞이 환해지는 시편을 열 개도 넘게 찾아 읽었다.

 

--- 2023년 5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