둠벙 만들기-무너지지 않도록, 물이 잘 모이도록
고성 둠벙 시말기③-2
12. 바깥이 높고 안쪽이 낮도록
흙을 충분히 파냈으면 이제 돌로 벽을 쌓는 작업이 시작됩니다. 크고작은 돌도 충분히 모아놓았습니다. 용도에 맞추어 적당하게 차례대로 쓸 수 있도록 큰 돌과 작은 돌, 반듯하게 생긴 돌과 그렇지 않은 돌을 먼저 분류부터 잘 해놓아야 합니다.
큰 돌은 지접돌(받침돌)로 쓰고 작은 돌은 적심돌(돌을 쌓을 때 안쪽에 심으로 박는 돌)로 씁니다. 둠벙 바닥에는 돌을 깔지 않습니다. 대신 가장자리에 돌아가면서 크고 납작하고 반듯한 돌을 놓습니다. 이것을 지접돌이라 하는데 주춧돌 역할을 합니다. 가로세로 한 자 정도는 되어야 했는데 가져온 돌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썼습니다.
지접돌을 놓는 바닥은 무르지 않고 단단해야 했습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오래도록 무너지지 않는 것은 둠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를 위해 여러 차례 다졌던 것은 기본이고요. 땅이 퍼석퍼석하면 더 파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다음에는 바깥을 조금 높게 하고 안쪽을 좀 더 깊이 파서 낮게 합니다. 지접돌은 그에 맞추어 비스듬하게 놓이게 됩니다. 수평으로 놓지 않고 바깥쪽이 높고 안쪽이 낮도록 까꾸막(가풀막)을 지어서 놓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접돌을 쐐기처럼 박아넣어 힘이 안쪽으로 쏠리도록 해야 돌이 바깥으로 비어져 나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지접돌을 놓은 위에 벽면과 조금 떨어져서 널찍한 돌은 바깥쪽에 쌓고 작은 돌로는 그 안쪽을 채워 넣습니다. 이 적심돌도 잘 채워줘야 하는데 너무 잘면 안 됩니다. 자갈 정도 크기는 되어야 하고 모래 정도로 작으면 도로 흘러나오기 때문에 또 안 됩니다. 쌓아 올리는 각도는 75~80도 정도가 적당합니다. 그래야 어그러지거나 무너지지 않고 튼튼하게 오래 갑니다.
한 길 정도 1.5m 안팎까지는 이렇게 널찍한 돌로 바깥쪽을 쌓고 그 안쪽을 적심돌로 채워 넣는 작업을 계속합니다. 그 이상 높이에서는 적심돌을 많이 넣지 않아도 되고요, 마지막 1m 정도 남겨놓고는 적심돌 없이 한 겹으로 쌓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일률적으로 미리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잘 쌓으려면 결국 일머리가 있어야 합니다. 일을 하면서 보고 실정에 맞게 임기응변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대체로는 바깥쪽이 높도록 비스듬하게 쌓는 것이 맞지만 형편에 따라서는 수평으로 평평하게 쌓는 것이 좋은 때도 있습니다. 이런 걸 제대로 가늠할 수 있는 감각과 눈썰미가 중요한 셈입니다.
13. 물을 향한 간절함 ‘궁개’
둠벙은 아시는대로 물이 배어나게 하고 모아두는 공간입니다. 여기에 한 방울이라도 더 배어나게 하고 모아두기 위해 조상들이 고안한 장치가 있습니다. ‘궁개’가 바로 그것입니다. 논 밑을 파서 길게 둠벙과 이어지도록 길게 낸 땅속 터널이 궁개입니다.
둠벙마다 모두 있었던 것은 아니고요 오히려 궁개가 없는 둠벙이 더 많았습니다. 먼저 둠벙 밑바닥과 같은 깊이로 너비 1m 가량 되도록 기다랗게 파냅니다. 길이는 필요에 따라서 짧으면 3m를 팔 수도 있고 길면 100m를 팔 수도 있습니다.
다음은 양옆을 너비가 30~40㎝ 되도록 돌로 차곡차곡 쌓습니다. 높이도 보통은 30~40㎝가 많지만 필요하다면 120~150cm가 되도록 크게 할 수도 있습니다. 돌 쌓는 방법은 둠벙과 같습니다. 밑바닥에는 돌을 깔지 않고, 지접돌을 놓은 위에 바깥쪽은 널찍한 돌을 쌓고 안쪽은 적심돌을 채워넣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구들장처럼 널따란 돌을 떠 와서 그 위에 걸쳐지도록 뚜껑을 덮으면 됩니다. 옛날에는 이처럼 돌로 터널을 만들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구멍 뚫린 플라스틱 관이나 흙으로 만든 토관으로 대신하는 경우도 생겨났습니다. 어쨌든 그 위에다 다시 흙을 덮으면 아무 탈 없이 원래대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 궁개는 둠벙처럼 물이 배어나게 하는 집수(集水) 기능과 물을 모아두는 저수(貯水) 기능을 기본으로 합니다. 어차피 땅속이니까 이렇게 구멍을 뚫어놓으면 이를 통해 물이 배어들기 마련이고 공간도 그만큼 더 생긴 셈이니까 물을 모아둘 수 있는 용량도 커진 셈이니까요.
게다가 때로는 물을 끌어오는 도수(導水) 기능도 하였습니다. 가령 둠벙에서 30m 떨어진 지점에 고랑이 있어서 물이 흐른다면 그 제방 바로 밑에까지 이어지도록 궁개를 만들어 붙였습니다. 고랑 쪽에서 스며들어오는 물을 거기서 둠벙까지 끌어오도록 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궁개, 참으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궁개를 보면 당시 물이 얼마나 귀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 귀한 물을 한 방울이라도 더 얻기 위해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으며 얼마나 머리를 쥐어짰는지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궁개는 생존을 위한 지혜와 노력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궁개를 실물로 볼 수 있는 둠벙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메워져 있습니다. 바로 옆에 널찍하게 콘크리트 둠벙이 생기면서 거기서 퍼낸 흙으로 메워놓았습니다. 새로 둠벙이 생기는 바람에 당장 필요하지는 않으니까 그럴 수 있었습니다.
돌로 쌓은 벽면도 그대로이고 아래에 궁개도 원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차저차한 사정으로 메워져서 참 아쉽고 아깝습니다. 하지만 손상이 가는 것은 아니고 필요하면 언제든 복원할 수 있습니다. 이왕 메워진 김에 손타지 않고 원형 보전을 한다고 생각하고 적당한 때를 기다려야지요.”
14. 벌둠벙도 있었고
둠벙은 대개 벽이 지면과 수직에 가깝도록 쌓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펑퍼짐한 보통 웅덩이 같은 모양의 둠벙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둠벙은 둠벙이지만 제대로 된 둠벙은 아니라는 뜻으로 벌둠벙이라 합니다. 여기서 ‘벌’은 ‘대충’ 또는 ‘충분하지 못한’이라는 뜻입니다.
벌둠벙은 물이 날 것 같아서 팠는데 물이 충분히 나지 않는 경우에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더 파 봐야 실익이 없겠다 싶어서 그만둔 것인데 그래도 조금 나는 물이나마 고여 있도록 하거나 아니면 천수(天水=빗물)라도 담아둘 요량으로 메우지 않은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런 벌둠벙도 옛날에는 제대로 된 둠벙과 마찬가지로 그 벽을 돌로 쌓았습니다. 저수지 제방과 비슷한 각도로 비스듬하게 마감을 했습니다. 드러난 흙을 그대로 두면 무너져 내리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돌로 쌓지 않고 흙이 그대로 나와 있는 벌둠벙도 있습니다.
이런 흙으로 된 벌둠벙 가운데는 돌을 쌓을 수 없어서 그대로 둔 경우도 있습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조금밖에 파지 않았는데도 물이 터져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솟아날 때가 그렇습니다. 돌을 쌓을 수 없을 만큼 물이 거세차게 나오기 때문인데요, 이러면 그대로 두는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15. 이제는 콘크리트 둠벙도
요즘 들어 콘크리트로 만든 둠벙이 부쩍 눈에 띕니다. ‘보강토’라고, 큼직하게 찍어서 그냥 쌓기만 하면 되는 것이 있는데 이것으로 사방을 널찍하게 둘러싼 둠벙들이 많아졌습니다. 옛날처럼 하나하나 돌로 쌓으려니 귀찮아서 손쉬운 보강토를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콘크리트 둠벙을 보면 아무래도 낯설고 생뚱맞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지역에서는 둠벙이 자꾸 줄어들고 있지만 고성에서는 보강토 콘크리트로나마 계속 새로운 둠벙을 만드니까 둠벙의 효용성이 인정되고 있는 거구나 싶은 생각도 들기는 합니다.
물론 콘크리트 둠벙도 장점이 있습니다. 앞서 얘기한 대로 쉽게 쌓을 수 있고 크기도 한량없이 키울 수 있습니다. 이에 더해 흙이 무너져 내리거나 틈새에 찌끄레기가 끼는 것 등을 좀더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된 전통 둠벙을 보전한다는 관점에서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울러 자연이나 생태 관점에서 보아도 환영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돌로 쌓은 둠벙에서는 올챙이·개구리·미꾸라지 같은 것들이 틈새로 들어가 살 수도 있고 풀이나 나무들도 함께 어우러지지만 콘크리트 둠벙에서는 불가능하거든요. (계속)
##<슬로우뉴스>에 실은 글입니다.